네 마음을 지키라
잠언 4장 23절
하트 교회 차명권 목사님
잠언 4장 23절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사도바울은 에바브라를 회심하게 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세 사람이었는데 사도바울이 에바브라를 회심하게 했고, 이 골로세 사람이었던 에바브라가 골로세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직접 골로세 교회가 가보진 않았습니다. 늘 기도와 인편으로 양육하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골로세 교회는 거짓 교리와 철학도 거짓 사상들이 골로세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죠. 그렇게 골로세의 교회를 흔들었지만 바울은 그때 위치가 어이였냐면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 안에서 골로세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골로세 교회의 소식을 듣고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골로세 교회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골로세 성도들의 어떤 모습을 보고 바울이 너무나 기뻐했을까 감옥에서
골로세서 2장 5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첫째는 너희가 질서있게 행하고 있다는 소식에 기뻐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하다라는 소식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여기서 첫번째 나오는 질서 있게 행했던 골로세 교인들 여기서
질서 있게 행한다라는 것은 블레포(보다) 탁시스(근원을 우선순위에 둔 질서) 가장 근원적이고 변하지 않는 그 진리를 우선순위에 둔 질서를 말하죠. 탁시스가 그렇습니다. 골로세 성도들이 질서 있게 행한 것은 당시 유혹과 어려운 시기였지만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더욱더 많은 사상과 철학과 유혹들이 많이 있죠. 동일한 여건입니다. 골로세 교회 때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들이 질서 있게 행했다고 하십니다. 골로세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생명의 근원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질서 있게 행했다는 것은 이것이 참 영성이죠.
참 영성은 질서있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참 영성이죠.
오늘날 이 영성이라는 단어가 참 광범위하게 쓰입니다. 영성은 무엇인가 어떤 때 보면 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쓰면 참 고상한 거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뜬구름 잡는 거 같기도 하고, 영성은 무엇입니까?
영성에 대한 오해들이 많이 있죠. '참 저사람 영성이 있다.' 이런 말들 하죠. 흔히 영성이라고 하면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고상하게 생각하고 생활하는 그러한 방식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사실 이 영성이라는 것은 중립적인 개념입니다. 중립적이어서 어디에다가도 갖다 붙일 수가 있어요. 기독교에만 영성이 있는 것이 아니죠. 중립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불교 영성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힌두교 영성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기독교 영성 이렇게 영성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나 붙일 수 있는 중립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러면 무엇이냐?
기독교 영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사람 영성이 있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지금 질서 있게 행한다는 것과 연관 지어서 영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정의하자면 어떠한 정신으로 사느냐 이것입니다. 영성은 막 뜬구름 잡고 목소리 깔고 고상하게 사는 게 영성의 핵심이 아니고 어떠한 정신으로 살아가느냐 불교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는 뭡니까? 불교의 영성을 가진 자죠. 기독교의 영성을 가진 여러분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바로 기독교 영성을 가진 자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영성 생활을 하십시오. 이제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제가 강단에서 영성생활을 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영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라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죠. 즉,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고 그분의 모든 생명과 지혜와 또 공급의 근원으로 알고 그분을 가장 우선순위로 아까 탁시스라는 게 질서 할 때 탁시스가 가장 근본적인 생명의 근원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삶을 질서 있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모든 근원적인 생명과 지혜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우선순위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영성 있는 그리스도인이며, 이 골로세서에서 말하고 있는 질서 있는 행함입니다. 여러분들 기독교의 영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십시오. 바울과 마찬가지죠. 저도 여러 사정으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그런 성도가 있을 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둔 삶에서 그들이 멀어지고 또 믿음이 말라버린 소식을 들으면 밤잠을 이루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리고 눈물로 기도를 하죠. 그러나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고 믿음이 굳건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보다 기쁘고 행복할 때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한 그러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정신 힘든 일이 오기라도 하면 그냥 믿음이 흔들려 버리고 그리스도를 못 박아 버리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폭풍이 와도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며 그 폭풍 속에 숨어있는 소망을 폭풍 속에 소망이 숨어 있습니다. 폭풍 속에 숨어있는 그 소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폭풍을 딛고 그리스도와 함께 날아오르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절망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성을 제자리로 붙잡아 주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늘 듣고 들어도 새롭죠. 예수님이 집에 오셨을 때 마르다는 분주한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의 위치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마리아는 첫째,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고,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했고 마리아는 그 가진 것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9절 / 42절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의 자리있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안식의 땅입니다. 마리아의 위치는 안식의 땅입니다. 마르다처럼 부엌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안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이 계속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안식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안식하면 젖과 꿀이 여러분의 삶에 흐르기 시작한다라는 것이에요. 젖과 꿀이 왜 흐르지 않느냐 안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식하면 젖과 꿀이 흐르게 돼있습니다. 나의 삶에 젖과 꿀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이 흐르기를 원하신다면 나의 힘으로 그것을 취하고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면 되는 것이에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도록 약속을 받았죠. 신약에 오면 그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바로 안식입니다. 복음은 어떻게 보면 이 안식의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구약은 예수님이 이루시지 않았기 때문에 끝없이 인간에게 의를 요구하고 행위를 요구하고 수행을 요구하고 인간에게 기초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꾸만 뭔가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다 이루었다 하십니다. 이제 성도들에게 남은 것은 가장 위대한 성도들의 영성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할 때 예수님이 이루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흘러오기 시작한다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스 4장 11절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거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과 안식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즉, 안식의 반대말이 불순종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순종하십시오 라는 말은 무슨 뜻이라는 뜻입니까? 안식하라는 뜻입니다. 안식하지 않는데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안식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영역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이 뜻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안식을 명하십니다. 안식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한 것이 안식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이 진리 이 기초 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믿고 받는 것입니다. 구약은 행하는 것이지만 신약은 주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믿고 앉아서 안식하며 받는 것이에요. 믿음의 영역에 사는 것입니다. 감정의 영역에서 살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릅니다. 이 감정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복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이 감정의 영역에 휘둘리지 않고 믿음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도 유익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것은 그 원인이 복음을 듣긴 들었어요. 그런데 믿음의 영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안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유익 복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저도 설교하면서 계속 이 안식을 생각합니다. 늘 그런 거 같아요. 제가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 교수님이 얘기했듯이 쇼맨십을 발휘하고 성도들을 즐겁게 하면서 하면 설교가 더 잘 전달이 될까? 이런 인간적인 유혹들이 막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너 힘으로 하는 거 아니다 안식해라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런 유의 목소리들 속에서 계속 이 설교가 진행되는 거 같아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직장에서도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도 자꾸만 뭔가 내가 나의 노력들이 첨가가 돼야 이것이 더 잘해질 거 같다는 것이 두려움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땐 탁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하십니다. 이렇게 인정해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저도 이렇게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히브리서 4장 2절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
시키지 아니함이라
복음을 들었는데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바로 듣는자가 무엇과 결부시키지 못했다? 믿음과 결부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성경에는 말씀합니다. 능력은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능력이 되기를 원한다면 즉,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죠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도 유익이 되고자 한다면 듣는 여러분이 믿음의 영역에서 살아야 합니다. 유익하지 못하는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죠.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노력과 자꾸만 결부시키려고 했던 것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 너희들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2000년 전에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죠. 너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동일하게 너희도 채찍에 맞고 그 무거운 십자가 지면서 동일한 고통을 당해라라는 뜻입니까? 아니죠. 예수님이 이루신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돼야 하는 거예요.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행위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초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 형벌이 우리가 받은 형벌이었다 나는 죽지 않았지만 예수가 죽음으로 인하여 그때 내가 죽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예를 들면 그런 것이죠. 나는 죽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죽었다. 옛 자아가 죽었다.
예수님이 부활했기 때문에 나도 부활한 자가 되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동일시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뭡니까? 나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죠.
나의 십자가예수님이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나도 끝없이 그 십자가를 지고 끝없이 율법을 지키고 채찍을 맞으면서 살아가야 된다라는 그런 어떤 신학의 개념은 아직까지도 나의 십자가가 되지 못했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그 유익을 얻고 싶다면 듣는 여러분이 믿음의 영역에서 살아야 합니다. 주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여러분이 낫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내가 났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야 한다라는 것은 아직도 나의 십자가가 아닌 거예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 동떨어진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그것이 나의 십자가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나는 이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 믿음이 믿음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믿음과 결부시켜서 그 십자가의 유익이 나의 믿음이 될 때 그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내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죄가 사함받고 의롭게 되었음을 믿고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십시오. 안식은 믿음의 자세입니다. 믿는다라는 것은 안식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식하고 있으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있는 땅이다 이렇게 성경은 표현하고 있지 않다고 했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풍요로움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안식할수록 공급이 흐르고 치유가 흐를 것입니다. 사람이 범죄 한 후에 모든 것이 망가졌기 때문에 복음은 모든 면에서 치유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이 되는 복음의 능력을 듣고 우리가 생명 가운데 살아나죠.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치유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한 단어로, 내 생각이 치유되고, 마음이 치유되고, 관계가 치유되고, 질병이 치유되고 아담의 잃어버린 그 영광이 회복되는 그 모든 것들을 치유의 관점으로 말할 수가 있죠. 육신의 질병이 치유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있는 조급함이라는 질병을 먼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설교를 통해서 이번 주에 저와 또 여러분 가운데 주시는 메시지가 이것이에요. 너희 가운데 있는 조급함이 치유가 되어야 한다. 육신이 치유되기 전에 관계가 치유되기 전에 여러분의 삶에 모든 영역에서 치유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너희 마음 가운데 있는 이 조급함 이것이 치유가 되어야 한다. 조급함은 믿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우리의 의식 속에 은연중에 내면화된 규범이 바로 내면화된 규범 우리가 당연시 그렇게 해야 된다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게 돼버린 이러한 내면화된 규범이 바로 바쁨, 급함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물어보면 어 바쁘게 살지라고 대답을 합니다. 바쁜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취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난 아직 바쁘지 않게 살아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은 뭔가 뒤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의식 속에 우리의 내면화된 규범이 있습니다. 바빠야 되는구나 조급해야 되는구나 달려가야 되는구나... 이 코로나가 왔지만 저는 코로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가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의 바쁘고 서두르는 영혼의 속도를 늦추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우리는 그동안 아내도 안보였고, 자녀도 안보였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아내랑 부부 싸움할 때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데 아내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거더라고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하고 이것을 원했는데 나는 아내를 위해서 열심히 밖에 나가서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내 아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우리는 너무 바빠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코로나가 우리에게 주시는 스탑 사인이에요. 제가 볼 때는. 너무 바빠서 말씀도 기도할 시간도 우리는 아까워했죠. 지금도 많은 드라마를 몇 시간이나 시청할 수 있지만 이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10분을 앉아서 말씀과 시간을 나누는 것을 우리는 힘들어하죠. 그분께서 내게 주시는 그러한 평안에 영과 능력과 지혜를 우리는 속도를 낮추고 주님과 만남을 통해서 받는 시간들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죠. 예수님이 그렇게 내 발 앞에 앉으라고 하시는데도 우리는 너무나 바빴고 급했습니다. 여러분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도 여러분의 삶에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 열매를 맺는 비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죠. 그런데 그 비밀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너희는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을 떠나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나 안타까워요.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거든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러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 하루를 마감하면서 이 말씀을 조용히 입술로 고백을 한 번 해보세요. 주님 나는 주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터치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산산조각을 내버리십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그 단단해진 내 자아를 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이 고백을 할 때, 생각만 할 때보다 입술로 내뱉어서 주님께 고백할 때 더 파워풀합니다. 주님이 나의 인생의 전부이지 생각하는 것도 물론 능력이 있겠지만 가만히 앉아서 주님을 의식하면서 주님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주님을 높여드리고 주님을 인정해 드리죠. 그러면 성령께서 내 안에 정말 춤추듯이 기뻐하시면서 역사하십니다. 내 마음의 모든 어두움과 더러움과 그런 것들이 전부 씻겨 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도 예배 가운데 있지만 정말 조용히 읊조릴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위대한 신앙입니다. 나 주님을 떠나서도 잘할 수 있어 내가 한 번 잘해 볼 테니까 내가 필요할 때만 주님이 조금씩 도와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죠 우리는 이건 아닙니다. 물론, 외현적으로 우리가 생각이 들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앉아서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께 고백해 드리는 거예요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호흡도 주님이 붙들고 있죠. 그렇게 잘난 듯 살아봐야 주님이 그 호흡을 거두시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인생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완전히 의존된 인생이라는 것을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여러분의 삶에서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면 결혼 생활이든, 자녀 양육이든, 여러분의 직장에서든 좋은 열매를 보기를 원한다면 우선적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새겨 들으싶시요.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뛰어다니는 것과 반대입니다. 분주하고 조급하고 바쁜 것과 반대입니다. 이것도 성취하고 저것도 성취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내가 해 보려고 하는 제단에서 내려오시고 속도를 늦추십시오. 특별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제일 바쁘고 경쟁이 1위인 나라인데도 자살률이 1위이고, 우울증이 1위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상처받고 교회에 왔더니 교회는 더 경쟁으로 우리를 몰아갔어요. 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나서 안식을 알았죠. 주님의 다 이루심 그것을 우리가 믿고 주님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고 동행하는 그러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속도를 줄이기만 하면 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이렇게 돼있죠. 주님이 내 안에 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주님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써 영원히 내주 하는 관계가 되었죠. 그러한 관계를 깨달은 자는 내가 주님 안에 그것은 쉽게 비유하자면 물속에 우리가 다이빙하는 주님의 정신으로 다이빙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로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안식하는 삶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르다는 영광의 주님을 손님으로 모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중심부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분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에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화가 났죠. 도와주지 않는 동생에게 화가 났고, 그러한 동생에게 언니 좀 도와주라고 말하지 않는 예수님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스트레스를 받고 분주하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하고 있다는 억울한 느낌이 들 때가 되면 그때가 바로 여러분이 안식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아라. 나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하나님이다. 네가 나를 먹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내 발 앞에 앉아라 그리고 내가 너를 먹이도록 허용하라. 우리는 오병이어에서 먹었던 자들의 자세를 보세요. 거기 모두가 앉아 있었어요. 마리아처럼 앉아 있을 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생명의 역사를 할 터인데 그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일지라. 나로 하여금 너를 축복하게 하라. 주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실 때에는 평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이 스트레스 가운데 있을 때에는 평안의 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방식을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5장 12절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라 제가 지난 주 큐티에서도 끝에 하나님과 묵상하다 그렇게 했었죠. 기뻐하고 또 기뻐하십시오. 기독교는 존 파이프 목사님이 크리스천 해도니즘이라는 말을 썼어요. 해도니즘이란 기쁨을 말하죠. 기독교는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기쁨의 역사로 하나님의 생명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말씀입니다. 기쁨의 기독교입니다. 기쁨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뻐할 일이 있을 때는 당연히 기뻐하죠.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하셨을까요? 기뻐할 수 없을 그러한 상황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할 일이 있을 때에는 당연히 기뻐합니다. 하지만, 기뻐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일 때에도 모든 것이 무너져있는 상황에서도 내 앞에 많은 산적한 문제들이 있는 것 가운데서도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으로 나아가면 평안의 인도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스트레스 가운데 있고 걱정 가운데 있고 하면 여러분은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데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인도하시냐면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주님께 평안을 구하고 그 평안을 받아 회복하고 즐거움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 주신 평안입니다. 여러분이 다음날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돼있다 칩시다. 여러분 가운데 평안이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평안이 있었어요. 이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갈릴리 호수가 잔잔하다고 해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게 아니죠. 좀 잔잔해졌으면 내가 평안이 있겠다 갈릴리가 잔잔해진다고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때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고 흔들리는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여러분이 시련을 지나고 있을 때에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영과 혼과 육의 모든 면에서의 샬라밈 평안들입니다. 나의 평안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샬롬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죠. 나의 평강, 나의 온전함을 나의 기쁨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저는 주님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프신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서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 읽으면서 예수님이 서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시기와 보복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28장 16절
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라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견고한 기촛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않게 되리라. 조급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급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망치고 있는 급함이 있습니다. 주님은 모두를 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은혜의 리듬 속에서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준비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대답하시고 반문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삭개오의 경우에도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시다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대화를 나누시죠. 전혀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삭개오를 보시고 멈추셨어요. 그리고 대화를 나누시고 모든 일정이 있었을 텐데도 내가 오늘 밤 너의 집에 거하리라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 조급하지 않음과 이 신실함이 급함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준비하지 못하고 계획하지 않은 많은 환경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멈추고 서두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그 사람과 연결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예수님도 삭개오를 만났을 때 삭개오와 연결되었습니다. 삭개오와 이야기를 나누시고 삭개오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 삭개오와 대화를 나누고 삭개오의 집에 유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이 멈추시고 여러분 앞에 주어진 모든 환경들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연결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계획한 것이 아니야. 이 사람은 지금 내가 염두해 둘 사람이 아니야 우린 다 그렇게 하죠. 내가 세운 계획과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전개되지 않는 것을 전부 다 쳐내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끝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기의 삶에 펼쳐진 하나님의 모든 것들을 축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주신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고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아내를 주셨습니까? 그런데 남자들은 다른 곳에서 또 여자를 찾아요. 그만큼 저주스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남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에 멈춰 서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십시오. 그 자녀를 즐거워하십시오. 펼쳐진 상황을 즐거워하시고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그 안에 천국이 숨어있습니다. 딴 곳에 가봐야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얘기하죠. 자녀가 95점을 받아오면 다음날은 100점을 받아 오라고 합니다. 다음에 또 100점을 받아오면 너만 100점이냐 이러고 1등을 받아오면 다음에 1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긴장해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흔한 예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우리가 감사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고 끝없이 우리는 미래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를 받을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 = 라존(히브리어) = 덱토스(헬라어) = 은계가 충만한 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차고 넘칠 때를 말합니다. 미래에 어떤 것을 목표로 정해 놓고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가는 과정들을 축복하고 우리가 축제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모든 여정들과 순간들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보면 좌우로 되어 있죠. 그것이 수직으로 중앙에서 만납니다. 참 그것을 늘 묵상할 때마다 좌측의 반과 우측의 반이 과거와 미래를 뜻한다고 본다면 과거의 모든 것들을 우리가 용서하고 씻어내고 흘려보내고 잊어버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죠 우리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수직으로 만나는 그 중앙입니다.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를 소망하면서 어디로 수렴해야 하는가 우리는 현재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 현재를 하나님 속에서 바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때요 바로 은혜의 때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쁜 아빠 바쁜 남편이 되지 말고 자녀와 또 아내와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죠. 삭개오의 경우에 주님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님이 미리 세운 계획이 아녔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다가올 때에도 거창한 거시적인 일들을 핑계 삼아서 아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들을 품고 아이들을 축복하고 아이들을 안수하고 그들을 즐거워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이 그곳에 이미 왔던 것이죠.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평안을 안고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신뢰한다면 이 시간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두려운 마음으로부터 지키시고 근심하는 마음으로부터 지키시고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를 소망하면서 현재에 주시는 모든 여정들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과 두려움으로 지키면 생명의 근원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게 될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생명의 근원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 마음을 향하여 주님이 선포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 마음으로부터 생명의 근원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하게 솟아날 줄로 믿습니다. 매일 우리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두려워 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했었더라면 ~하지 않았더라면 과거에서 우리가 생각을 할 때 그거 했더라면 그거 하지 않았더라면 후회하죠. 그러한 과거를 보혈로 용서하고 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롭고 더 나은 축복이 앞에 있는데 그 마음을 지키십시오.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이 일어나면 어쩌지? 또 이렇게 두려워하며 걱정합니다. 이런 식으로 과거에 대해서 자꾸 ~했더라면 하고 후회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두려워하며 염려합니다. 그것에 우리의 마음이 묶여서 현재를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 젊은 날이 그랬습니다. 사실 지금 마음을 지키고 즐거워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그곳에 있고 바로 지금이 은혜의 때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를 소망하고 현재를 감사함으로 즐거워하는 복음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미래는 미래가 돌 볼 것입니다. 오늘을 기뻐하십시요. 주변을 돌아보시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머물고 시간을 보내고 경청하고 이야기를 하십시오. 아내가 이야기를 할 때 귀를 기울이십시오. 사람들이 말하길 벌써 이 나이란 말인가 이런 소리를 많이 합니다. 내 나이가 벌써 이거다 참 이렇게요. 하지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이를 잊어먹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년에 내가 몇 살인지를 생각하며 걱정하는 것보다 지금을 즐거워하고 지금을 기뻐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서두르지 않으면 버스를 놓칠 텐데 지금 서두르지 아니하면 성공을 놓칠 텐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촛돌로 둔 자는 절대로 다급하지 않게 되리라 주님은 끝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조급함과 서두름이 사실은 미래에 실패를 가져오는 요인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음을 믿고 하나님이 내 모든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하셨음을 믿고 안식하며 감사로 오늘 주신 모든 시간과 사람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최고의 찬양과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양을 오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미국에서의 생활이 아무리 좋았어도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 땅에서 제가 땅을 밟는데 너무너무 좋더라고요 저는 일제 강점기에 끌려가서 오랜 세월을 지나고 나이가 70, 80이 되어도 한국 땅을 밟는 사람의 그 감회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같은 땅인데도 그 받아들이는 감사와 찬양과 그 기쁨이 얼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왔을 때 같은 땅이지만 한국에 같은 땅이지만 정말 이 대한민국 이 조국을 나에게 주시고 이 땅을 밟는 그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점점 사그라드는 거예요. 땅이 변했기 때문입니까? 내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인 거죠. 내 마음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기뻐하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못했던 것이에요. 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한국이 경쟁이 심하고 조급하고 바쁨에 규범이 있는지 몰라요. 거기에 제가 어느새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다시금 안식하기를 원하십니다. 멈춰 서서 주님이 주신 그 모든 것들을 감사하고 최고의 찬양과 감사와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러한 하루하루를 보낼 때에 여러분의 삶 가운데 생명의 근원이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고 문이 열리고 하늘의 놀라운 축복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흘러넘칠 줄로 믿습니다.
<기도>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참 분주하고 조급하게 우리들이 달려왔습니다. 이 사회속에 태어나 이 나라 속에 태어나 습관화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규범 속에서 우리는 안식을 잃어버리고 멈추어서는 법을 잃어버리고 끝없이 나에게 주신 아내와 남편을 즐거워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의 자녀를 축복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남이 했던 말 사회가 규정해 놓은 가치관들 그런 것들 속에 나의 자녀를 끼워 맞추려고 얼마나 학대하고 얼마나 다그쳤습니까 그들을 즐거워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을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그 죄 많은 삭개오 앞에 멈추어 서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와 시간을 나누고 삭개오의 집에 하룻밤을 자며 즐거운 찬치를 열었던 것처럼 하나님 우리의 삶에 펼쳐 놓으신 하나님의 아름답고 놀라운 선물들을 보고 또 누리며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천국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곳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조급함과 모든 분주함을 내어 놓기를 원합니다. 두려움과 모든 근심이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떠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마음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조급함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영이 안식 가운데 깨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육신의 질병도 치유함을 받고 또한 우리의 모든 관계든 우리의 모든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에 생명이 흘러갈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이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임을 믿습니다. 하나님 주님을 즐거워하며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 가운데 최고의 찬양과 감사와 기쁨의 하루를 올려 드릴 때에 생명의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임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의 과거를 보혈로 용서하고 씻습니다. 주님이 다 용서하셨는데도 내가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 앞에 굴복합니다. 주님 나는 보복하고 싶고 주님 나는 응징하고 싶고 주님 나는 다른 생각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다 용서하셨음을 나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의 삶을 용서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모든 과거를 용서해주신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주님 주님이 주신 미래를 소망합니다. 주님 선하고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소망으로 받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 지금이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임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받습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에게 주신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 놀라운 것들이 펼쳐져있는데 주님 우리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귀를 열게 하여 주시고 이야기를 나누게 하여 주시고 품게 하여 주시고 사랑하게 하여 주시고 용서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이 가정과 하나님이 주신 나의 이 모든 관계들과 하나님이 주신 이 민족과 이 나라를 품고 사랑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불평과 두려움 고 염려가 떠나가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 감사와 기쁨과 평안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영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아 주시옵시고 평안으로 인도함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살아나셨음에 감사합니다. 살아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무덤에서 모든 죽음을 남겨두고 생명으로 일어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과거와 나의 모든 상처와 나의 모든 아픔들이 주님 무덤에서 남겨진 채로 새 생명으로 부활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임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주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았음을 선포합니다. 주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주님 나의 마음을 지키게 하여 주시옵시고 평강으로 지키게 하여 주시고 기쁨으로 지키게 하여 주시고 주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주님께서 주신 이 하루하루를 최고의 주님이 주신 선물로 주님께 올려드리는 귀하고 복된 은혜의 때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분주하고 조급한 우리의 영혼을 주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사단에게 빼앗긴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그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이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임을 믿습니다. 과거를 보혈로 용서하게 하시고 미래를 소망하되 지금을 감사로 즐거워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모든 전쟁이 있는 땅 가운데 총칼이 멈추게 하여 주시고 특히 이 한반도를 지켜주시사 모든 전쟁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강같이 흐르며 젖과 꿀이 흐르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다시금 부흥하는 귀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이 지키시고 돌보시고 이 마지막 때에 보배같이 사용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모든 질병으로 또 병상 가운데 있는 환우들 주님 찾아가 주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또 보혈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워 주시고 그의 삶 가운데 온전히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드린 예물 위에 기름 부으시고 쓰이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위로 교통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근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켜 은혜의 때를 생명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흠 없고 거룩한 교회 위에 선교사님들 위에 나라와 민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언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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