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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꾸의 나의 하나님

번제와 그리스도를 아는 삶 레위기 1장 1-5절 │하트교회 차명권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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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와 그리스도를 아는 삶 
레위기 1장 1-5절 
하트교회 차명권 목사님
(2022. 3. 13)

레위기 1장 1-5절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죠.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죄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잠언 4장 18절과 같은 구절을 볼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잠언 4장 18절
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의인에 관한 말씀이죠. 신약의 성도들인 여러분은 의인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속량하셔서
여러분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절을 볼 때 내가 뭔가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을 갖추어서 
그렇게 되면 나에게 이러한 약속이 주어지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구약적 사고 입니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는 악인에 불과했구나 이 축복이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구나
그렇치만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행하신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이 의인은 나에 대한 
말씀이구나 이렇게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부딪히죠. 나의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이 부딪힙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붙잡아야 되는 거예요.

펜데믹 가운데 있고, 또 전쟁과 요동치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이 전망하는 것과 같은 어두운 미래가
믿는 여러분 앞에 있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죠.
하나님의 약속 또 하나님의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입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나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잊으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는 말은 미래에 하나님이 선하심을 펼칠 것이라는 확실하고 긍정적인 기대를 소망이라고 합니다. 

좋은 날 보기를 사랑하는 자는 그 입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내 육신의 눈으로 또 나의 생각으로는 안 될거 같고 
못할거 같고 망할 거 같고 어두운 미래만 있을지라도 그 악한 말을 금하고 생명을 보기를 좋아하는 자는 악한 말을 
금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입 가운데 담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항상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항상 감사하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거대한 거인을 보지만
우리는 거대한 포도를 봅니다. 열두 정탐군이 거대한 포도를(두사람이 매고 왔다고 그랬죠 그정도로 컸습니다.)
매고 왔다고 했죠. 그런데 정탐군들은 무엇에 집중했습니까 거대한 거인에 집중했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대한 포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하는 것이죠. 
물론 장벽도 있고 거인도 있지만 하나님은 여리고성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 갈 때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백성들의 총과 칼로 무너졌습니까?
소리 한 번 지르는 것으로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죽을 거 같았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끝났구나
내 인생이 형편이 없구나 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였다라는 것이예요. 

사십년 전에 열두 정탐군들이 카데스 바네아에서 똑같은 땅을 정탐하러 갔었죠. 그리고 열 명은 두려움 가득 
안고 돌아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십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돌게 하시고 여리고성에
들어가게 하시고 어떻게 이 성이 무너지는지에 대한 비밀을 밝혀 주시죠. 소리를 한 번 지르는 것으로 
사십년 전에도 거대한 열두 정탐군을 보냈을 때에 그 땅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었던 거예요? 소리 한 번 지르는 
것으로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때의 그들은 그들의 연약함과 그 거대한 거인과 장벽들을 보고 
두려움에 떨면서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사십년이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 소리 한 번 지르는 것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통하여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적과 우리를 비교하면 공포가 우리를 잠식 하겠지만 적과 하나님을 비교하면 모든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 안에서 그 거대한 장벽과 짐과 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이 일천한데 또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저런 장애가 있었고 나는 실패만 했는데 그렇게 
스스로 거대한 여리고성을 쌓지 말고 영광의 하나님을 향해 찬양의 목소리를 높이시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가나안 땅은 신약에서 그 땅은 오늘날 안식의 땅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히브리서에서 이 여리고성에 들어가는 사건을
신약의 히브리서에 말씀하시면서 그 때는 가나안 땅이 였지만 그것이 신약적으로 안식이다. 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믿는다라는 것은 안식한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화요일 수요일 정도만 되면 주일에 들었던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낫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 버리고 입의 절망과 낙심을 담고 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매주 
안식을 선포하기 위해 이 강단에 오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다시 그리스도께 두도록 하기 위함이죠. 

히브리서4장 1절
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하지 않는 것이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순종을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성경이 말하는 순종의 본질은 안식하지 않는 것이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전쟁이 예수께 속했다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하실 것을 기대하며 안식하는 것 앉는 것 그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안식하고 기다리라고 말씀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전쟁을 치르시고 승리하시는 것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이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기도하는 그 성취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이예요. 여러분은 안식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배에 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폭풍은 멎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자라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다른 이런 저런 사역과 다른 어떤 봉사와 이런 것들의 열심인 사람과 제가 목회 경험으로 확신 하건데 또 말씀을 통해서 확신 하건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고 그 말씀을 사모하며 끊임없이 말씀과 가까이 했던 사람의 성장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 말씀이 사람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예수님 자신 이거든요. 우리는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유튜브나 많은 곳에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리학적으로 많은 것을 가르치고 많은 것들을 하죠. 하지만 복음은 달라요. 복음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 분을 만나면 우리 가운데 변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통해서 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맞치고 주님께 분양을 맞치고 성막을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성막 밖에 기다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 제사장이 축복을 합니다. 백성들은 그 축복을 받기 위해서 제사장이 그 성막을 들어 갈 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올 때까지 제사장은 나와서 백성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축복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축복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민수기 6장 25~26절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고 나와서 항상 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사장의 축복 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이 축복을 받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계속 기다렸습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 이것이 제사장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서신에는 처음과 끝이 대부분 무엇으로 시작해서 
무엇으로 끝이 납니까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계속 은혜와 평강을 강조해서 서신서에서 기록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바로 제사장의 축복을 하는 것이죠.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언하여 여러분에게 제사장의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언제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바라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은혜와 평강을 넘치도록 받느냐 그 비밀은 무엇이냐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은혜와 평강을 우리가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법을 성경은 알려 주고 있죠. 

베드로후서 1장 2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Q. 방법이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수 있는 비밀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아주 중요한 말씀이죠. 그래서 이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인데 베드로서 1장 2절 방금 읽은 말씀은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것 그 아는 것이 바로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길임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는 삶이 영생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은혜와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것을 통해 여러분 가운데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예수그리도를 더욱 알아가는 삶이 되십시요. 그래서 다윗도 모든 것을 가졌던 다윗도 내 평생에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하면 그 소원은 바로 여호와의 전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것이다. 주님과 가까이 더욱 가까이 주님을 알기를 원하는 다윗의 소망이 여러분의 소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Q. 그러면 어떻게 알아가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난 주일 엠마오 마을로 들어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성경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씀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일순위 입니다. 듣기를 원하시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속에서 듣기를 원하십니다.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변화되고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보는 만큼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여러분을 주님을 바라보는 만큼 여러분은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성경에서 보는 것과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공생애때 나사렛에 가셔서 많은 지혜를 보이시고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였죠. 그런데 이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어요. 어릴 때부터 예수님이 코흘리개 때부터 같이 자라고 보고 했던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가서 기적과 표적을 보였을 때 사람들이 더욱 믿지 않았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찾을까요? 메시아로 접근하기 보다는 어릴 때 그 육신의 예수에 집착해 있는 거죠.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 던 그 예수가 아니냐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우리가 아는 목수가 아니냐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그 고향 사람들이 많은 기적과 표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냐면 받지 못했다...그런데 그 이유를 뭐라고 기록하고 있냐면 믿지 않음으로 인해서 받지 못했다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예수를 목수로 바로보는 한 그들은 받지 못했던 겁니다. 고향 사람들 이였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믿었더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 담겨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7-58절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과 그들이 믿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죠. 그들은 믿지 않았고 그 이후로 예수님의 많은 능력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예요. 그들이 믿지 않음은 그들이 예수를 그저 자연적인 수준으로 봤던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마르다도 예수님을 자연적인 수준으로 봤어요. 사마리아의 많은 사역을 하시고 자신의 집에 왔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의 그 피곤한 얼굴 피곤한 몸 지친 그 하나의 인간으로만 자연적 수준으로만 봤던 것이예요. 그 예수님을 맛있는 것을 대접해서 힘을 내시라고 부엌에서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려고 했죠. 자연적인 수준 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그 자연적인 수준 이면에 있는 생명의 주님에 대해서 눈을 떴던 거예요. 자연적인 수준을 넘어 섰던 것입니다. 껍질을 넘어 섰던 것입니다. 생명의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분임을 마리아는 깨닫고 그의 발치 앞에 앉았던 것입니다. 자연적인 수준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참 된 방식으로 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자연적인 수준 인간 영웅적 인간 이렇게 그치면 이것이 해방 신학으로 가버리는 거예요. 제 3세계의 식민지에 있는 나라들을 해방시키는 또 가진 자들에게 억압 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 이러한 해방신학 적으로 예수님을 모델링 삼아서 신학이 흘러가버리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수준에서 그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본질이 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수준을 넘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천국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그러한 영원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대한 눈을 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사렛에는 병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 때문에 받지 못했다고 했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그랬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죠. 나는 "에고 에이미"(i'm / 현재형) 마르다가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빠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때 에고 에이미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살아서 역사하는 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뭐라고 하였냐면 예수님이 그때 오셨더라면 조금 빨리 오셨더라면...오라버니가 살았을 것이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마르다의 생각입니다. 과거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너의 오빠가 살아 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네 우리가 장차 부활 할 때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미래에는 일어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무엇을 생각하지 못했냐면 지금 나를 살리실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에고 에이미 현재형으로 말씀 하신 이유는 뭐냐면 내가 지금 살릴 수 있는 분이고 내가 지금 너희를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주님에 대한 인식 믿음의 깊이를 깊이 우리는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우리들의 교육수준이나 우리들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에게도 도리어 숨기시고 젖먹이들에게 나타 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
     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온전히 나타내죠. 여러분들도 어릴 때 생각해 보십시요. 장난감 하나가 필요하면 내가 열심히 일해가지고 내가 이 장난감 사야지 라고 생각하지 않죠. 아부지 한테 얘기 해야겠다 아부지가 사주겠지.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나타내시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아빠에게 달라고 해야지 젖먹이들은 막 울잖아요. 그것은 무슨 메세지 입니까? 젖먹이들은 우는 것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찾습니다. 자기의 생명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보고 듣고 아는 지혜도 마찬가지예요. 주님을 더욱 알아가는 삶을 우리는 원하고 있죠. 그 주님을 알아가는 지혜도 누가 주신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다는 것입니다.

레위기에는 다섯 가지의 제사가 나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다섯가지 제사가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가 번제 입니다. 제일 처음 나옵니다. 

번제

레위기 1장에 나오죠. 이 번제를 통한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레위기 1장 1절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기의 시작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여기서 부르다라는 것은 영어로
called =바니크라(카라call의 3인칭 단수) 바니크라에서 레위기(Leviticus)단어가 나옴
불렀다라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이처럼 멀리 있는 우리를 가까이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통독할 때 우리 레위기는 통과 그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는 우리를 가까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레위기를 읽을수록 어떻게 된다는 것이예요? 더 가까이 주님과 가까이 간다는 것이죠. 사실은 이것저것 제사가 나오지만 사실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와 더욱 가까이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이 제사는 번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번제는 제물을 번제단에서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불에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번제(burnt offering)=burnt(태움)+offering(제물,고르반approach near)가까이 가다
이 번제는 가까이 간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죠. 레위기 자체에도 주님께 더욱 가까이 이런게 있지만 이 번제라는 첫번째 제사에서부터 우리를 더욱 가까이 두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번제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끄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니예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른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이것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받으신 다는 것이죠.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번제 (1) 수송아지 (2) 양 수컷, 염소 수컷 (3) 비둘기

번제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수송아지 입니다. 둘째는 숫양과 숫염소 입니다. 크기가 점점 작아지죠. 셋째는 비둘기 입니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눠져 있습니다. 왜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눠져 있을까요?
이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표면적인 의미는 계층의 차이예요. 가난한 사람에게 소를 받치라고 하지 않으시죠. 그래서 그때는 부유하고 재산이 있고 계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싼 소를 받칠 수 있고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은 비둘기를 받치게 했습니다. 이것이 표면적인 의미입니다. 이것도 의미가 있죠. 상류층은 수송아지 중간계층은 양이나 염소를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비둘기를 받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냐 이렇게 크기가 소에서 양과 염소로 양과 염소에서 비둘기로 작아지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십자가의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볼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라볼 때 성경을 읽을 때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지만 사람마다 그 깊이가 차이가 있죠. 그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죠. 아예 율법적으로 껍질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근데 또 성경 속에서 예수를 보지만 예수를 바라보는 깊이에 대해서 아주 선하신 건 맞아요 하지만 때로는 내가 잘 못하면 나를 교통사고 나게 하시는 그런 분이기도 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비둘기 같은 믿음 이예요. 이 수송아지는 가장 큰 크기 입니다. 그래서 이 수송아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깊이 이해하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깊이 가장 깊이 중간 크기인 양이나 염소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여서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이렇게 보통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양으로 묘사가 되어 있죠. 이것은 일반적인 인식 수준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은 양이시기도 하지만 수소이기도 하죠. 수소에 이르기를 더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수준이! 양에 크치는 것이 아니라. 비둘기는 가장 작은 크기인데 예수그리스도의사역의 이해가 아직 작은 경우를 말합니다. 이렇게 크기는 다르죠. 크기는 달라도 그 효과는 동일합니다. 어떤 효과를 말하냐 하면은 하나님께 향기를 발산하죠. 이 모든 것이 태워져서 하나님께 향기가 되어 올라갑니다. 그래서 그 향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측면에서는 효과가 동일하다는 것이예요. 모두 다 아름다운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로 받으신 다는 것이예요. 즉, 그 번제가 크기는 다 다르지만 태워져서 하나님께 올라갈 때에 하나님께 그 향기가 그의 아들을 상기시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이예요. 세 부류가 크기는 다 달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그 향기에서는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향기 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자가 비둘기를 드려도 그 자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수송아지는 강하죠. 양은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비둘기는 하늘의 피조물 입니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비둘기가 나타내죠. 이 모두가 수소,양,염소,비둘기가 예수그리스도의 측면들을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수송아지 정도에 이르지 아니하면 제물을 받지 않겠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여인은 주님의 옷자락을 아주 작은 터치로 만졌지만 여인은 주님의 온전한 생명을 받고 나음을 입었죠. 그런데 다른 측면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근데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크기가 커질 수록 수소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 수소의 크기가 커질수록 성경을 통해서 주님에 대한 계시가 커질 수록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알수록(수소에 이를수록) 더욱 은혜와 평강을 받게 됨

그리스도를 알아감으로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소 그다음에 숫양, 숫염소, 비둘기 이것이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알아 갈 수록 수소에 이를 수록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게 된다는 것을 그러한 신학적인 하나님의 마음을 레위기에서 그림 언어로 제사로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3-4절에서 우리는 수소에 대해서 읽은 것입니다. 비둘기까지 읽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수소를 드리는 자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소와 숫염소, 숫양 그 다음에 비둘기 이것이 묘사를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어요. 하나님의 거룩한 마음이 수소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번제물에 안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번제물에 안수하는 것의 의미는 동일시 입니다. 

수소의 머리에 안수함 = 동일시 (identification)

십자가 위의 예수께 우리가 손을 대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우리를 포개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안수는 그래서 번제의 세 부류 중에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그러한 장면은 어디에만 있습니까? 수소에만 있어요. 레위기를 쭉 읽어보면 수소에만 안수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두 부류 양이나 염소 그리고 비둘기에는 손을 얹고 머리에 안수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의 인식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예요? 동일시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그 동일시에 대한 이해의 능력이 부족함을 의미합니다. 비둘기로 내려 갈 수록 수소는 머리에 안수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완전한 나의 죽음이고 주님의 부활하심이 나의 완전한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님은 죽으셨고 나는 죽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죠. 그러면 수소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나와 동일시 되는 것이 아니죠. 수소의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수소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이 동일시는 예수를 바라볼 때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내가 죽고 부활 하심과 연합하여 내가 완전히 포개져서 내가 정말로 모든 죄에서 사함받고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완전한 동일시에 이르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손을 얹고 안수하는 그 수소는 흠이 없습니다. 흠이 없다라는 것은 흠이 없는 수소를 가져와야 되죠. 그것은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죄가 없으신 완전하고 온전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위에 손을 얹으면 그 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가 동일시 되는 것이예요. 더이상 우리 자신의 죄와 우리가 동일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가 동일시 되는 것입니다. 수소에 손을 얹는 것은 정죄되는 상태와 동일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로 우리가 동일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진리와 동일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하면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수소에 안수하고 그와 동일시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음을 우리가 믿고 아는 것이예요. 탕자에 비유해 보면 큰 아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큰 아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든 것이 바로 다 너의 것인데 너가 여지껏 그것을 알지 못했구나 큰 아들의 착각은 무엇이냐면 또 큰 아들에게 주님이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냐면 완전한 동일시예요. 이 의로움을 통하여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임을 왜 알지 못하느냐 오늘날에도 여러분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에 마치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하나님께서 내어주지 않으려고 내어주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전한 기도는 어디에 이르는 것이냐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소에 안수하듯이 완전한 동일시가 일어나며 내가 더이상 죄인이 아니며 의인의 믿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이 나의 것임을 탁 알아버리고 믿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도의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관계속에서 있다라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연약함과 넘어짐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조금 모순적인 것 같지만 맞는 말씀이예요.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인생이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 틀린 말인게 뭐냐면 이미 가깝다라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 지고 가까워 졌느니라 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이미 가까워 졌습니다. 이미 가까워 졌다는 것은 점점점점 깨달아 가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면 가까워진다라는 것입니다. 가까워 지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떤것에 가까워 진다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까워 진것에 대한 믿음이 깊어 진다라는 것을 더욱 가까이 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에 안수할 때에 또한 역으로 우리의 죄가 소에게 전가가 되죠. 우리의 죄를 뒤집어 쓴 소는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의 죄가 소의 것이 되고 소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과 또 곤고함 까지도 전가가 되어서 죽었습니다. 이 진리가 도저히 다른 부류인 양과 염소 비둘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이것을 말씀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을 영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수소에만 안수하는 것 즉, 주님을 볼 수록 주님께 일어난 일이 모두 나에게 일어난 일임을 볼수록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수소에게 안수하는 그러한 영적인 의미를 훈련하고 있죠.

즉,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의롭고 흠없고 거룩한 자입니다. 

그래서 수소에 안수하는 동일시에 대한 선포예요. 양과 염소 비둘기에는 발견되지 않은 오직 수소에게만 발견되는 동일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흡없고 거룩한 자입니다. 거기에 대한 믿음이 깊어 질 수록 더욱 받게 될 것입니다.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제물은 하나님께 받아 드려지고 각각은 향기로운 향기가 되어 주님께 드려진다 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제물은 예수님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영생을 얻습니다. 이 영생이라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큰 앎이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 우편에 있던 그 강도가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영생을 얻었겠습니까? 깊이 엄청나게 알아야 합니까? 오늘 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가 예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큰 앎이 필요한 것이 아니예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그 분의 피로 내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이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어둠을 이기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냐면 은혜와 평강과 생명을 넘치도록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의 어둠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은혜와 평강이 넘치도록 필요하죠.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바로 수소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예요. 우리는 수소를 사모합니다. 비둘기에서 양과 염소로 또 양과 염소에서 수소로 더욱 큰 믿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수소는 여러분에게 큰 믿음을 줄 것입니다. 번제의 제물을 이렇게 가지고 오면 제물을 가지고 온 자는 칼을 들고 직접 죽입니다. 제물을 가지고 가면 제사장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칼을 쥐어 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 제물의 목을 따게 되어 있습니다. 직접 수소를 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가지고 온 자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너라는 것이예요. 우리의 죄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참혹하게 죽으셨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직접 칼을 쥐어 주고 제물을 죽이게 만듭니다. 가지고 온 자가 직접 죽이게 하는 것은 또 차이가 있습니다. 세 부류가 있다고 했죠. 직접 죽이게 하는 것은 두 부류에만 있습니다. 수소와 양과 염소까지 입니다. 비둘기는 제사장이 죽입니다. 비둘기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얕은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에 정말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믿음에 대한 믿음과 앎과 인식이 얕은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앎이 비둘기에 올수록 약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그 칼이 주어졌고 여러분 손으로 그 제물을 죽입니다. 피가 튀고 제물은 고통 속에 죽습니다. 남의 죄가 아닌 바로 나의 죄로 인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상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정말 죽으셨다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죄가 정말 죽었고 사함을 받았다라는 것을 믿고 너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음을 깊이 알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에서도 본문에서 죽이게 되있지만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아들 앞에서 소를 죽여버리는 거예요. 정말 너의 아들의 위치는 견고하고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너를 위해서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가운데 점점 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서 양과 염소 그리고 수소의 믿음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고 넘치는 삶이 되기를 바라고 그 영생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많은 영혼들에게 전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기도
하나님 이 시간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을 더욱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말씀 가운데 주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나의 생명이시며 나를 도우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인생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 속에 선한것이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사모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갑니다. 하나님 다른 곳에서 충만과 다른 곳에서 회복과 다른 곳에서 온전한 생명을 구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님께 구하며 주님께서 성령 가운데 주시는 지혜와 그 생명을 받아 나를 통해 흘러가 많은 죽어가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통로로 저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비둘기에서 또 양과 염소로 또 염소에서 수소로 그 수소에 동일시 하는 안수가 있었던 것처럼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이 나의 죽음과 부활임을 깊이 깨닫고 알고 믿으며 주님의 그 생명과 의와 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이시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결코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주님을 더욱 알아가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무엇을 알기 위하여 방황하였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그토록 분주했습니까 불안하고 두려워 했습니까 사랑하는 나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앉지 못하고 주님 너무나 많은 시간 주님과 멀리 떠나 방황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레위기의 말씀을 통하여 가까이 오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운 자가 되었음을 믿게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그 말씀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알고 또한 믿는 인생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양과 염소 또 수소의 믿음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시고, 또 주님을 통하여 우리의 삶 가운에 은혜와 평강이 충만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앎을 통한 충만한 은혜와 평강을 통해 그것이 세상 가운데 흘러가게 하시고 어두움 가운데 빛이 되게 하시고 양식이 없는 기근의 땅에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도록 저희를 사용하여 주시옵시고 통로로 삼아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운데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말씀 가운데 주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아이와 같이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시며 나를 도우실 유일한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사모합니다. 말씀 가운데 주님을 더욱 알게 하시고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수소의 제물에 이른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혼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다르리시는 믿음의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수소의 죽음과 함께 나의 옛사람이 죽고 나의 죄가 죽고 나의 모든 어둠이 죽었음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와 평강이 넘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크라이나와 그 전쟁이 있는 땅에 하나님의 평화와 자유를 회복시켜주시고 예배가 회복되고 교회가 더욱 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생명 가운데 더욱 부흥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또 산불과 재난 가운데 눈물 흘리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주셔서 위로 하여 주시고 온전한 복구와 삶의 터전이 회복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 새로운 대통령과 함께 이 나라를 주님 손에 의탁합니다. 새롭게 하여 주시옵시고 또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온전히 드러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질병 가운데 있는 자들 주님 진리의 말씀으로 붙들어 주시옵시고 보혈의 능력으로 낫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님 예배하고 일평생 주님을 알아각고 찬양하는 삶의 자리로 늘 불러주시고 세워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고백하고 드린 예물 위에 기름 부으시고 쓰이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위로 교통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 감으로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사모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흠없고 거룩한 교회 위에 선교사님들 위에 나라와 민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언하옵나이다. 아멘

 

 

번제와 그리스도를 아는 삶(레위기 1장 1-5절)ㅣ하트교회 주일예배(2022. 3. 6.)ㅣ차명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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