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이른 하나님의 도성
히브리서 12장 22절
하트 교회 주일예배 │ 차명권 목사님
히브리서 12장 22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오직 주님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주님 존전에 나아갑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
죽은 영이 살아나게 하시고 잠든 영이 깨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는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틈을 매워 주시고
무너진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선포되어 모든 무너진 것들이
다시 세워지고 회복되는 온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진리는 우리를 쉬게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진리를 우리를 자유케 하고 진리는 우리를 쉬게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도착하지 않았죠.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도착한 자 입니다. 여러분의 영이 쉬지 못하는 것은
아직 도착했다라는 믿음 가운데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성도들이
그 영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유는 영이 여전히 안식하지 못하고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의 안에 안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영이 안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도 안식하지 못하고 있고 육도 안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불안하고 두려워 하고 염려하고 몸도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에
몸도 쉬지 못하고 있죠. 그 근본적인 것이 영이 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우리는 분별해야 하지만 제가 볼떄는 가장 근원적인 이 시대의 문제는 뭐냐하면
쉬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쉬지 않는 것이예요.
우리가 수 많은 기도를 하고 수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안식에 들어가라
내가 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생명과 하나님의 일하심이 자꾸만 막히고 우리 사회의
정치든 교육이든 어디든 하나님의 생명이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끝없이 자기의 생각이 높아지고 자기의 힘이 발휘 될려고 하죠. 안식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힘을 내려 놓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것입니다.
무엇이 잘하고 잘되고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아서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이
무엇이다?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영이 살아 있기를 원하십니다. 뭐로 말미암아? 의로 말미암아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이 살아 있기를 원하시죠?
깨어 있기를 원하시죠? 성경이 주는 답은 이 의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로가 아니라. 구약의 의는 행위의 의입니다. 그래서 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내산은 끝없이 불 붙는 어두운... 가까이 다가가면 모든 것이 죽어가는
쉼이 없는 산이였지만 신약에서 말하는 의는 선물로 주시는 의 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성취로 인한 선물로 주시는 의 입니다. 그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의
내가 주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내 영에 선포가 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질 때 내 영이 안식하게 되고 살아나는 것이예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입니다.' 이것은 보통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그것을 위해서 오신 것이예요. 선물로 의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밖에서 나의 힘으로 의를 성취하면서 살려고 했던 그 끊임없는 고통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고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안식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의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이제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때문에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마음 껏
넉넉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것이 나의 것이 되었다라는 그 놀라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이 선물로써의 의에 여러분이 안식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정말로 제가 여러분에게 주고 싶은 진리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달립니다. 이 예배당을 나서자마자 여러분은 달리기
시작할 거예요.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임재 묵상과 멈춤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멈춤의 상태에서 묵상하는 것은 안식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묵상이예요.
이것을 계속해서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 교회에 뿐만 아니라 한국 또 이 땅에
하나님의 강력하게 역사하시고자 하는데 그것을 막아서고자 하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힘을 내려 놓고자 하는 것이예요. 우리는 계속해서 달립니다. 우리의 영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달립니다. 그렇게 달렸어도 지난 시간동안 그렇게 달렸어도 도착하지 못했다면
앞으로 더 달려도 도착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지와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달립니다.
우리는 꿈에서 까지 달립니다. 멈추지 못하는 영의 불안이 꿈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목사님 이런 꿈 꿨습니다. 저런 꿈 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 일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렇게 볼 때에는 또 많은 경우에는 꿈 속에서 까지 달린 거예요.
그 불안과 초조와 염려가 그 꿈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한 치유는 없습니다.
멈추라는 것은 안식하라는 것이예요. 내 생각과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것은 과거나 미래로 도망가는 것이고 생생한 현실의 참 된 치유는 오지 않습니다.
현재를 살지 않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현재로 초청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는 현재형으로 지금 살아있는 나는 지금 너희에게 생명을
베풀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나사로가 죽었죠. 내가 살릴 것이다. 내가 지금
살릴 것이다. 현재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과거로 도망가고 미래로 도망갔죠.
" 네, 주님이 살리시는거 압니다. 주님이 조금 더 일찍 오셨더라면 살리셨을 수 있으셨을 텐데."
과거로 도망가죠. 아니야 내가 살릴거야 나는 부활이야 생명이야 그랬더니 또 뭐라고 합니까
"네, 장차 나의 오라버니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또 미래로 도망가죠.
현재를 살지 않습니다. 마르다가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지금 I AM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우리를 현재로 초청하는 것이예요.
그러니 나의 불안과 염려를 다 내려놓고 나의 생각과 나의 시간표를 내려 놓고 나의
스케줄을 내려 놓고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빼앗아 가거나 훔치거나
망치는 분이 아니세요. 지금 살리기를 원하세요. 그런데 그걸 자꾸 막고 있는 것이
내 생각과 나의 계획입니다. 안식하시고 주님을 즐거워 하시고 평안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게 되있어요. 멈추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걷고 달리기도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였다라는 안식과 평화의 영으로써 걷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멈춤의 훈련이 되면 우리는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영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죽은 몸도 살아나는 치유가 있습니다. 방금 읽었듯이
몸은 죄로 인해서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다라고 되어 있죠.
이것은 몸은 죽은 상태로 그대로 둔다는 말씀이 아니예요. 영이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면
죽어가는 몸 죽은 몸도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과 혼과 육이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영을 먼저 살리신 뒤에 영의 살리심을 통하여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겠다라는 것이예요. 병든 몸을 치유
하시겠다라는 것입니다.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겠다라는 것이예요. 불안과 두려움을 평안으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뭐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그 영은 뭐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것이예요?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것이다. 이 영적 구조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영이 먼저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혼과 육의 회복을 위해서 발버둥쳐도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여러분의 영은 선물로써의 의로 살아나고
그렇게 선물로써의 하나님의 의를 내가 받았다는 그 영의 살아남이 있으면 그 영의 찬양이 있으면 죽은 혼과 몸도
살아나서 주를 찬양하는 살아나는 회복되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두려움이 있고 미움이 있고
상처가 있고 그렇죠? 그러면 어디로 먼저 도피성으로 가야되죠? 영으로...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나를 향한 먼저하신 그 사랑을 선물로 주신 의를 묵상하며
깊이 그 사랑으로 차고 넘치면 성령께서 나의 상한 혼을 두려움을 미움을 불안을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몸도 치유해
주시는 것이죠.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묵상하죠. 그럴때면 예수님 안에는 조급함과 불안함이 있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기록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분주함이 있습니까? 조급함이 있습니까?
없다라는 것이예요. 그 예수님 우리가 작은 예수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 성경에 나오는 예수그리스도의 평화와 참 된 기쁨들이 다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저번에도 이야기 했듯이 주님은 막 가시다가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서 주님을 지켜봅니다. 주님은 지나가시다가 그 삭개오를 바라보고 주님은 무슨 계획이 없었을까요? 주님은 하시려는
일들이 있으셨지만 지금 현재 펼쳐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펼쳐진 삭개오의 만남에 충실 했어요. "
삭개오 내가 지금 할 일이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갔다와서
내가 이거 위대한 일들이 있으니까 삭개오는 너는 조금 기다려 내일 보자."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라는 것이예요.
멈춤에 능한 사람이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예요.
'아 나는 무조건 이것을 해야 돼! ' 나의 생각에 내가 내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여셔도 그것을 막아서는 것은 내 생각인 것이예요. 나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돼. 삭개오 너가 문제가 아니라 나는 반드시 놀라운 일을 해야돼! 이것이 자꾸만 하나님의 일을 막아서는 것이죠.
그러니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내 안에 잠잠히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잠잠한 음성을 듣고 깨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멈춤의 영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는 한 듣지 못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식하고 안겨 있을 때 주님의 심장소리와 그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분주합니다. 그래서 마틴루터는 이렇게 말했죠. 내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죠.
하지만 루터는 나는 너무나 하나님이 주신 일들이 많기 때문에 멈춥니다. 기도합니다. 안식합니다.
그렇게 말했던 것이죠. 위대한 하나님의 일은 안식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예요.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영성 훈련은 은혜에 이르는 훈련입니다. 내 행위와 노력으로 은혜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기 때문에 영광이 가득한 은혜의 집에 아버지의 집에 이미 이르렀다라는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 바로 영성 훈련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 어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와 함께 피크닉을 가자고 그런데 아버지가 내가 지금 바쁘니까 내일 가자 다음에 가자 계속 미루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날 지나가다가 장례식을 발견했습니다. 관에 죽은 사람이 운구행렬로 지나가는 거예요. 아들이 하는 소리가 이제 저 사람이 참 된 피크닉을 누리는 군요. 죽어야 우리는 쉬는 비참한 상황이 된 것이죠. 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은 살아 있을 때 참 된 쉼을 누리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놀라운 복음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받은 저주를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저주를 끝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너는 땅을 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담이 타락하면서 받게 된 저주 입니다. 땅을 갈아야 먹을 수 있게 된 저주입니다.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 인간이 땅을 재료로 만들어 졌어요. 아다마시라는 이 먼지라는 히브리어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담이예요. 우리의 진료가 뭐입니까? 땅이예요. 땅을 귀경하는 저주를 받은 것은 무엇이냐면 끊임없이 쉬지 못하고
우리의 육신의 힘을 발동 시키면서 살아가는 저주를 받은 거예요. 우리가...예수가 오셔서 그리스도의 피로 끊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귀경하는 저주를 끊어 버린 것입니다. 안식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은혜에 이르지 못하면
끊임없이 우리는 내 힘을 발휘하면서 나의 영과 혼이 계속해서 달려가는 아담이 받은 저주 귀경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 삶이 왜 이렇게 혼동되어 있고 혼합되어 있고 왜 이렇게 어둡고 기쁨이 없는 지를 알지 못하죠. 인간은 끝없이 자신의 육신을
채찍질하고 귀경하는 것으로 옛생명의 불안을 달래고 옛생명을 지키려고 해 왔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귀경을 멈추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갯셋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기록으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핏방울을 떨어트릴 때까지 모든 정성을 다 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정말 그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질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구나 이정도에서 그치면 안되는 거예요. 여기서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흘린 것은 정말로 그 땀이 피가 되어서 떨어지는 거예요. 땀이 그리고 그 피가 저주 받은 땅에 떨어졌고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했던 옛생명을 삶의 양식이 예수님의 피로 치유 된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할 때 그 땀방울이 피가 되어서 떨어짐으로 저주 받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고 그 피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예수의 피가 땅에 떨어짐으로 땅이 귀경하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흘림으로 귀경해야 하는 우리의 영혼이 이제는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
예수게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현대 과학자들은 이 부분을 발견해 냈죠. 극심한 상황 속에서 땀을 흘리면 그 땀을 타고 피가 세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며 그 땀이 피가되어 땅에 떨어지게 하심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힘쓰고 애쓰며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그를 믿는 자들 우리들이 애써 기도하는 것의 본질이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애써 간절히 기도하죠. 그런데 그것이 예전의 구약적 기도는 뭐냐면 우리의 육신을 귀경하는 간절함의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애쓰고 힘쓰고 간절히 기도하여 그 땀이 피가 되어 땅에 떨어짐으로 인해서 우리의 기도가 바뀌게 된 거예요. 우리는 간절히 기도한다라는 의미가 뭐냐하면 믿음의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짐으로 이제 우리가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 졌음을 주님의 공급하심이 끊임이 없으심을 믿게 되는 믿음의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예요.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귀경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고 쉼을 주시고 더 이상 달려도 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달리지 않아도 된다라는 것이예요. 예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근원적인 죄의 문제가 예수의 십자가로 해결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얻었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여러분은 의와 은혜의 땅 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예수의 십자가로 해결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달려야 하는 귀경의 올무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이 임하여 모든 귀경의 영에서 풀려나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하기를 축복합니다. 그 영이 쉬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땅 위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죠. 사람들은,,,,의인이지만 패배하는 롯과 같이 패배하는 의인의 삶을 자꾸 살아갑니다. 쉬지 못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봤죠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그 높은 산에서 쉬고 있었어요. 주님의 임재 속에 거하면서 신선한 복음의 그 프레쉬한 공기를 마시면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집에 도착했다라는 영과 혼과 육의 안식이 없기 때문에 쓴 뿌리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무너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믿음으로 은혜에 이르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 일상을 살아 가면서 여러분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은혜에 이르는 삶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내 힘과 내 생각과 나의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은혜에 이르는 하루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아침에 일어나면 뭔가 나의 생각이 탁 픽스 되어 있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떤때는? 열두시가 됩니다. 한시가 됩니다. 세시가 됩니다. 오전에 세웠던 계획들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불안하죠. 왜 불안합니까? 내가 세운 생각과 맞지가 않으니까 불안한 겁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은혜에 이르는 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주님이 내 생각과는 달리 흘러 가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 일을 행하고 계심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안식 하십시요. 생각대로 되지 않는 다고 불안해하지 마시고, 주님의 은혜를 믿고 은혜에 땅에 있음을 믿고 안식하십시요. 그러면, 훨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부작용도 없고 하나님의 때에 더욱 풍성한 생명으로 여러분을 차고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은혜에 이르면 괴로움이 치유되고 더러움이 치유되고 정결하여 질 것입니다. 쓴 뿌리가 제거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5~16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쓴 뿌리가 나는 것이 기록되어 있죠.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되고 괴롭게 되는 것은 쓴 뿌리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더럽게 됩니다. 정결하지 못한 생각과 마음과 삶의 양식으로 빠져들죠. 롯처럼...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버려 버리고 음식 한 그릇 눈에 보이는 그 사라질 것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이 오면 없어질 그 눈에 보이는 사라질 그 무가치한 것에 나의 모든 것을 집중하고 살아가는 무지 속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에서 없도록 하라라는 그 헬라어가 에페스코페어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살피라라는 것이 에피스코페어 입니다. 이것은 영어로는 over site 조금더 풀면 look deeply 깊이 살펴보는 거예요.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내 영혼이 또 내 주위에 있는 자녀들이나 내가 사랑하는 자들이 은혜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죠. 내 영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지 않도록 깊이 에피스코페어 하라는 거예요. 임재 묵상에 보면 고통과 행복으로 제가 나눠놨죠. 고통의 제일 처음이 인지예요. 그것이 인지라고 제가 써 놨지만 헬라어로는 에피스코페어 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는 거예요. 고통이 왔을 때 그 고통을 그냥 내버려 두면 커져서 나에게 더 큰 고통으로 찾아 옵니다. 우리가 죄를 생각하고 자꾸만 정죄에 빠지라는 것이 아니라 흘려 보내고 잊어버리고 떠나 보내기 위해서 에피스코페어 하는 거예요. 깊이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왜 그 고통이 나에게 자꾸만 반복이 되지? 왜 자꾸만 그 고통이 나를 심오하게 만들지? 깊이 들여다 봤더니 그것을 다루지 않고 뭡니까? 고통이 오면 TV를 켜서 그냥 잊어 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에피스코페어가 아니예요. 그냥 땜질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겁니다. 더 깊이 그것이 살아서 꿈틀거려서 더 커집니다. TV를 끄고 look deeply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의 보혈로 그것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겁니다. 잘가 해야 되는 거예요. 나를 자꾸만 고통스럽게 했던 그것이 내가 인정받고 싶어해서 그런거구나 아! 저사람에게 실망하고 그렇게 해서 내가 고통이 자꾸만 차올랐던 이유가 내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었구나 어릴 때 부모님께서 나를 한 번도 칭찬해 주지 않음으로 인해서 내가 끊임없이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싶어 했구나 그래서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그 사람의 인사 안했다고 이런 말한마디에 내가 상처가 극대화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TV를 켜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해서 자꾸만 무시하죠. 하지만 그것이 더 크게 나를 고통으로 밀어 넣습니다. 에피스코페어 그것을 look deeply해서 그것을 딱 깨달으면 되요.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구나.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고 주님이 나의 참 된 아버지이시고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더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내가 왜 사람에게서 사람은 사랑할 존재이고, 용서할 존재로 품을 존재이지 내가 하나님보다 더 그사람을 의지했구나 뭐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으니 이제 인정 중독으로 인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 고통은 이제 잘가라 예수의 보혈로 너는 죽었어. 더 이상 너는 나를 힘들게 할 수 없어, 떠나 보내는 거예요. 떠나 보낼때는 때려가지고 떠나 보내지 마시고 스마일~웃어 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지독하거든요 그것이 학대하고 떠나보내면 또 찾아와요. 친절하게 잘가~예수께서 너는 예수의 피로 아무 권세가 없고 나를 지배할 수 없는 죽은 고통이야~잘가 이젠 다시 찾아오지마. 떠나 보내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밟음을 묵상 합니다. 그 고통은 너무나 깊이 머물어 있으면 안돼요. 빨리 해결하고 밝음과 생명을 묵상해야 합니다. 거기에 깊이 머물고 물을 줄 수록 그것이 내 안에 자라는 거예요. 깊이 깊이 생명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묵상하고 주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그렇게 하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차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look deeply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라. 살피라 에피스코페어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마음을 다해서 살피는 것이예요. 그것이 정말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것이 다루어 지지 않고 남들을 사랑한다고 전국 방방 곳곳을 다니고 세계 땅 끝에까지 가서 열심히 전도 한다고 해도 물론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 안에 에피스코페어 하지 못하고 내 안에 있는 이 고통을 해결 할 수 있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상황에서 천하를 얻고도 너의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주님 말씀 하시죠. 여러분의 영이 자유케 되고 여러분의 영이 기쁨으로 회복이 되도록 주님은 무엇보다 더 원하십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면 자연히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진정으로 잘 돌보고 회복되고 치유되고 이 모든 고통을 복음으로써 다스리는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회복이 됩니다. 그것이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는 묶여있고, 불안해 있고 두려움 가운데 있으면서 자녀를 사랑할려고 해도 그것이 잘 되지 않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쓴 뿌리가 생기면 그것 자체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쓴 뿌리가 생기기 오래 전에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쓴 뿌리가 자꾸만 생길까? 하지만 그거 전에 뭐가 있었다? 은혜에서 멀어지는 그 사건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은혜에서 떨어진 것을 돌이켜 다시금 은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또 노력해서 은혜에 이르는 걸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아닙니다. 아 예수의 피로 내가 은혜의 땅에 지금 서 있구나 깨달으면 됩니다. 그리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것은 바로 은혜에서 떨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십계명을 주기도 전이였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받기도 전에 힘으로 가득 찼습니다.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십시요. 우리가 다 지키겠습니다. 좋아보이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래~한 번 지켜봐 하고 던져준게 십계명이예요. 지킬 수 없는 거야 너희는 오직 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것이야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주신 것이죠. 하지만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것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체계 즉 율법으로 나의 힘과 나의 능력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그러한 율법 아래에 있는 삶의 방식을 말해 줍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것을 보여주죠.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되어 보겠다고 했던 사건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받은 것은 율법 아래로 들어간 사건입니다. 그 전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불평을 해도...
아론의 리더십에 반항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딱 받고 나니까 그때부터 삼천명이 죽기 시작하면서 끊임 없는 죽음의 행렬이 시작됩니다. 그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죄를 지었죠. 행위적 죄를 지었죠. 하지만 죽지 않았던 거예요. 십계명을 받은 이후에 죄를 더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예요. 똑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왜 이쪽은 아무도 죽지 않았고 생명이 작동했고 왜 이쪽은 죽음이 작동했느냐 이것은 율법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삶을 살 것이냐. 이제 율법 아래로 들어가기로 작정 했을 때 그 율법은 예수의 피를 의지해서 우리를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너가 한 것을 보고 우리를 대우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심판과 죽음이 우리에게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에서 멀어지면 심히 두렵고 떨립니다.
히브리서 12장 21절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모세가 이 말을 하니까 이상하죠. 당대의 가장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 마져도 심히 두렵고 떨린다 참 참혹합니다. 당대의 가장 율법적인 관점에서 의인이라고 불리 던 모세 마져도 심히 두렵고 떨릴 수 밖에 없었던 산입니다. 시내산...율법 아래로 들어갔을 때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 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의인이였던 모세마져도 이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도 은혜에서 멀어지면 똑같은 것을 느낍니다. 두렵게 되고, 떨리게 되고 심히 두렵고 떨리는 것들에 사로잡히죠. 그 말은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져 있다는 뜻이예요. 그 두렵고 심히 떨리는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은 다시금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예요.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은 모세처럼 심히 두렵고 떨린다라는 이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시온산에 이른자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우편에 사는 것이며 나는 이제 시온산에 사는 자입니다. 나는 시온산에 삽니다. 시내산에 살지 않습니다.
시온산에 사는 자입니다. 예수의 피로
여러분이 어디에 사는 지가 중요하다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무엇을 했느냐 이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십계명을 받기 전과 후가 무엇을 했느냐가 똑같아요.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어디에 사느냐 인거예요. 시내산에 사느냐! 시온산에 사느냐!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타락했을 때 예수님의 첫 질문이 뭡니까? 아담아 너가 어디 있느냐? 너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너가 어디 있느냐? 시내산에 있느냐 시온산에 있느냐 그걸로 내가 너를 대우하겠다라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이 될 때 내가 무엇을 해야지 이거보다 예수의 보혈로 내가 시온산에 있습니다. 내가 은혜의 자리에 있는 자입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하는 품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Where이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이 열리고 두려움이 떠나고 기쁨이 차오르게 됩니다. 신약도 마찬가지 입니다. 구약도 제일 처음의 질문이 Where에 대한 것이였어요. 신약에 와서도 마태복음에서 첫 질문도 Where이예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너희가 무엇을 했느냐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 라는 것이예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 그 위치가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그 안에 너희가 있으면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여러분은 시내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시내산에는 하나님도 안계세요. 텅비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버린 산입니다. 천사도 없고 , 하나님도 없습니다. 모두 그곳을 떠났어요. 그런데도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시내산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시내산에 대한 기록과 시온산의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유심히 보면 시내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하나님도 없고, 천사도 없어요. 그런데 시온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하나님도 나오고 예수도 나오고 천사도 나와요. 다 이주했어요. 주소가 바꼈어요. 여러분의 주소도 바꼈어요. 그런데 아직도 시내산에 주소지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죠. 그러니까 계속 모세도 심히 두렵고 떨렸다라는 것처럼 계속 두려운 삶 떨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8절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이것이 시내산에 대한 기록입니다. 얼마나 어둡습니까 이곳은 더이상 여러분이 이르는 곳이 아닙니다. 불이 붙는 산 침침하고 어둡고 구름이 어둡게 빽빽하게 있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율법의 산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모습입니다. 이 기록에서 하나님은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현상만 이야기 하고 있죠.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하나님 안나오죠. 예수님에 대한 기록도 없죠. 그리고 천사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떠났고 천사도 시내산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와 천만 천사와
하나님의 너희는 시온 상에 이르렀다. 시온산에는 하나님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시온산으로 하나님이 주소지를 옮기셨어요. 하나님은 시온산에서 역사하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시내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천만 천사까지 언급되고 있습니다. 더이상 도움이 없어요. 시내산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우리를 도우는 천만 천사도 이제는 시온산에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내가 은혜 받은 자입니다. 은혜의 땅에 있습니다. 그 고백과 그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 시온산에는 예수님까지 언급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예수의 피. 예수가 나오죠. 모두가 다 있습니다. 시온산에는 이 시온산에는 예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피라고 했는데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가 시온산에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온산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받은 산이 아니라 예수의 피가 뿌려진 산인데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다라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피는 말을 합니다. 피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과학이 발전 할 수록 이 피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50년 60년 전의 미제 사건도 피 한방울로 모든 범인을 다 찾아 냅니다. 피는 모든 것을 말해준 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과학이 발달하면 피 한 방울로 모든 것이 이 피가 말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피는 무서운 거예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가 뿌려진 것이예요. 아벨의 피는 무엇을 말하느냐면 무언가를 계속 소리 치는 것이예요. 누군가를 살인해서 피를 뿌립니다. 그러면 그 피가 그 사람에게 계속 소리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죽인 살인자는 정부의 형법적인 형벌을 받지 않아도 그 피가 계속해서 자기에게 따라와서 그냥 자살하고 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피가 계속 와서 말을 하거든요.
창세기 4장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 떨어졌고 그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터 계속 끊임 없이 가인에게 소리쳤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소리쳤느냐 복수해 달라 아벨의 피는 복수의 목소리예요. 복수해라 복수해라 나를 죽인 가인을 처벌하라 형벌하라 복수의 피죠. 이것이 바로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예수의 피 입니다. 아벨의 피는 죄에대한 형벌을 호소하는 피입니다. 그 소리가 바로 율법을 받은 시내산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것이예요. 모든 사람들이 율법 아래에서는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온산은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피입니다. 예수의 피 입니다. 예수의 피는 무엇을 소리 칩니까?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이예요. 너희가 나를 이토록 죽였으니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똑같이 대우해주마 하지 않으셨어요. 주님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예수의 피입니다. 여러분이 예수의 피로 물들어 있으면 여러분의 영과 여러부의 입술에 이 말이 담길거예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의 피로 여러분의 피가 다 씻김 받았어요. 예수의 피로 어려분의 피의 흐르는 아담의 이 소리치는 복수의 피가 다 용서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저 사람에게 복수할꺼야 내가 가만히 있나보자 이것은 사단의 속임수 입니다. 법적으로는 그 모든 복수의 피가 여러분으로부터 씻겨 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되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품고 예수님처럼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들이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이 무능력한지 모르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여러분의 삶과 이 땅과 이 나라와 이 민족과 모든 세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용서를 외치죠.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 내가 너의 모든 허물을 기억하지 않겠다. 내가 너에게 나의 의를 선물로 주겠다라는 소리 입니다. 얼마나 좋은 예수의 피가 뿌려진 이 시온산에 여러분이 거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넘어져도 이제 아벨의 피가 아니라 예수의 피가 우리에게 소리칩니다. 시온산에서 아무리 여러분이 넘어지고 죄를 짓고 상처와 고통 가운데 있을 지라도 거기에 뿌려진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예수의 피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끊임 없이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하시며, 품어 주시며, 내가 너를 인도하겠다 통치하겠다 다스리겠다. 너는 안식하라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인 시내산은 요구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시온산은 공급합니다. 이 요구와 공급을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시내산은 요구하는 산 시온산은 공급하는 산입니다. 요구와 공급이 뒤 바뀐거예요. 신약으로 오면서. 성령을 받았다라는 것은 공급의 영이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교회가 탄생한 마가의 다락방은 이스라엘의 시온산에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고 교회가 탄생하죠. 그것이 시온산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은 그리고 그 시온산에서 영을 받고 베드로가 설교 할 때 시내산에서는 율법을 받고 3000명이 죽었지만 3000명이 살아나고 회복되는 역사가 시작이 된거예요. 생명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탄생하고 의가 이제 요구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공급되어 지는 것입니다. 너희들 의 안되는 거 알겠지 이제 내가 나의 의를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나의 의를 너희에게 주어서 너희를 살리겠다. 그래서 이 부족하고 부족한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의가 베드로에게 임해서 삼천명이 살아나게 된 것이예요. 베드로의 잘남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한 하나님의 의가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일을 할 떄나 사업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자녀를 양육할 때나 내가 주먹을 불끈 쥐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이렇게 하지 마시고 베드로처럼 주의 영이 임하사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의를 나에게 주셨고 내가 말 할 때 내가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의가 흘러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나는 한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의가 흘러 갈 것이다. 생명이 흘러 갈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살아나고 공급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라는 공급의 영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공급의 영이 임한다는 것이예요. 율법은 율법의 있는 이 의로움이 우리에게 없으면 저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율법은 끊임 없이 끊임 없이 요구 하고 요구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끊임 없이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은 와서 내게 끊임 없이 의를 요구하고 또 다른 의를 또 요구 할 것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의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를 공급해 주시는 거예요. 내가 끊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공급받고 있구나 생명을 공급받고 있구나! 이 공급의 영이 나에게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바로 볼 때 하나님은 끊임 없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구나 내가 그것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은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와는 멀어져 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일하십니다. 은혜는 공급하십니다. 그의 깊으신 뜻을 위하여 소원도 주시고 그것을 행 할 능력도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음과 능력을 다 주신다는 것이예요. 율법은 완전함을 요구합니다. 구약의 완벽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율법은 그런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의의 선물을 여러분에게 공급하십니다.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의롭게 대우 하십니다. 의의 옷을 입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순종적인 사람으로 봐주신다는 거예요. 아..내가 오늘도 순종 못했어...그것이 아니라 나는 비록 오늘도 순종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어도 예수님의 그 순종을 나의 순종으로 봐주시는 하나님의 의에 감사합니다. 그 힘으로 내일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자유롭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순종이 여러분의 순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은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더라고 아침에 일어 날 때에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해야 할 수 많은 일들에 대한 부담으로 가득 차있다면 그것은 요구 중심적인 마음이예요. 율법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면 실질적으로는 요구 중심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개를 바라봤지만 예수님은 그 초라한 것을 들고서도 왜 이렇게 내가 가진 것이 적지, 왜 이렇게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 밖에 없을까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고개를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공급 중심의 믿음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합니까 정말? 아니면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하나님을 향하여 여러분의 믿음의 고개를 들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손에 들고 있는 그 오병이어만을 쳐다 본다면 여러분은 끊임 없이 절망하고 두려워 심히 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하신 것처럼 고개를 드시고 축사하시고 그 축사하다라는 것이 헬라어로는 감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미 기적이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거 드시고 하늘을 보시며 주님의 모든 공급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감사했어요. 주님 감사합니다. 주여 이 모든 오천명을 먹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먹이게 된 거예요. 자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너는 이 세상의 어둠 가운데 빛이 될거야 하나님이 너를 빛의 자녀로 만드셨음에 나는 감사해 이러면 그 아이는 오병이어를 먹이는 기적을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예수님도 바라봤다는 것이예요. 충만한 공급 중심적인 마음 입니다. 그래서 이 오병이어 기적이 있은 뒤에 갈릴리 바다에 폭풍이 일죠. 배를 타고 가죠. 제자들이 그 폭풍 하나에 두려워 떱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하면 너희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벌써 잊었느냐 계속 눈에 보이는 현상들 폭풍들 파도치는 것들 작은 그 오병이어 여기에 내 삶을 가둬버리고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의 자녀를 축복해 주시고 사랑하시고 아름다운 미래를 가지고 계신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늘을 바로보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충만해지면 자녀를 축복해 줄 수 있는 거예요. 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수 많은 공급이 오기 훨씬 전에 주님은 공급을 바라 보았던 것입니다. 은혜의 땅에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일하셨다는 것이예요. 오병이어의 베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나는 공급의 영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쓴 뿌리가 오기 훨씬 전에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마음이 먼저 오는 것처럼 수 많은 공급과 수 많은 생명이 오기 훨씬 전에 은혜의 이르렀다라는 내가 은혜의 땅에 이르렀다라는 내가 시온산 위에 있다라는 그 마음과 믿음이 먼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급을 바라고 생명을 바라고 치유를 바라고 그러한 소망이 있다면 먼저 하늘을 바라보고 내가 시온산 위에 있음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나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어떨때는 시각화도 좋아요. 주님께서 끊임없이 나에게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를 간 적이 있는데 어마 어마 하더라구요 보통 폭포가 아닙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촥 떨어지는데 배를 타고 그 밑을 갔어요. 그 소리와 굉음과 그 파도에 그 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압도 당하는 거예요. 그거를 보고 나서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그것을 묵상하는 거예요. 가만히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하심이 그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나에게 끝없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시각화 한 것이죠. 내가 거기에 둥둥 떠있는 거예요. 제가 은혜를 알기전에 어떻게 했냐면은 수도꼭지 물이 안나와 기도를 하는데 내가 기도를 덜했나, 내가 헌금을 덜했나 수도꼭지를 아무리 열어도 물이 똑똑똑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이셨어요. 그런 하나님으로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그것을 조금 열어보려고 애썼던 신앙을 버리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신 일을 알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는 매마른 수도꼭지가 아니라 나이아가라 폭포 보다 더 광대하고 끝없이 끝없이 나에게 주시고 주시고 부어 주시고 나를 잠기게 하시는 그러한 태평함 보다도 더 넓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나에게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시온산 입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업에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피가 뿌려졌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다니는 이 학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학교입니다. 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자녀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 말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위대한 공급하심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혈입니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요. 보혈을 놓치지 마십시요. 이 피가 뿌려진 곳에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할 때에는 이미 온 치유와 공급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제게 기도를 부탁할 때가 있죠? 짜내듯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묵상하죠. 공급중심의 영으로 제가 기도하는 거예요.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나의 어떠함에 달려 있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할 때 하나님의 끝없는 치유가 이 사람에게 쏟아질 것임을 믿는 예수의 피 때문에 그 공급하심의 영이 내 가운데 차고 넘치는 거예요. 그 때에 기도합니다. 그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의인의 기도고, 믿음의 기도로 갑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고치고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기도하는 사람의 영이죠. 하나님이 끊임 없이 공급해 주십니다. 이미 이 사람을 낫게 하셨습니다. 나의 삶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현실화 되는 거예요. 그 기도는 반드시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왔다. 즉 공급이 왔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선물로 왔다라는 것입니다. 치유가 왔다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왔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절대로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짐승이라도 오면 다 죽여 버리겠다. 십계명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어조가 그렇게 바꼈어요.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했던 하나님의 음성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나자, 짐승도 오지마 다 죽여 버릴거야. 이렇게 바뀐거예요. 왜냐하면 시내산의 율법은 우리가 율법 아래로 들어가면 끊임 없이 요구하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는 그 요구를 맞출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어린아이 조차도 자기에게 오는 걸 허락하셨어요. 품으셨어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품으셨던 건 뭐냐하면 내가 주겠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일하겠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 가운데 두려워 떨고 걱정 가운데 붙들고 계신게 있습니까? 그럼 고백하십시요. 주님이 일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여기에 생명을 흘려 주시옵소서. 시온산에서는 의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가까이 오지 말라 떨기나무의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말라 한것과 달리 신약에서는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말씀하십니다.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
그래서 우리 교회는 다윗의 장막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다윗의 장막은 모세의 장막과 달리 휘장이 없어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은혜가 회복이 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그 휘장을 걷고 두려워 떨면서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갔던 구약이죠.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실 때 기록에 보면 휘장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찢어졌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찢어졌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지 않고 위에서 부터 아래로 이 휘장이 찢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구원의 일을 하신거예요.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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