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임꾸의 나의 하나님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장 2절 하트교회 차명권목사님

반응형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장 2절
하트교회 차명권 목사님 

히브리서 12장 2절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
   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크신 사랑을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주일 아침입니다. 여러분 중에 자기가 숨 쉬고 있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숨을 쉬면서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걸 의심하지 않죠. 숨 쉬고 있는 것을 확신하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있는 것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심을 확신하십시오. 저는 종종 그렇게 합니다. 제 들숨과 날숨을 이렇게 느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숨을 내쉬고 숨을 들이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시구나 숨을 내쉬면서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숨을 들이쉬면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셨구나 우리는 많은 곳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또 알게 되지만 또 호흡에서도 주님의 살아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호흡이 주께 있다고 했죠. 우리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 능력과 자기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 순간 자기의 호흡을 가져가시면 우리는 먼지처럼 사라 질 존재입니다. 이는 호흡이 주께 달려 있음을 알고 호흡이 있는 자마다 주를 찬양하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이죠. 우리가 믿고 우리가 전하는 유일한 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를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하게 되면 보통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고린도 전서 1장 23절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가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거리끼던지 아니면 미련하다고 합니다. 그 십자가가... 사실 당시에는 그래도 예수를 실제로 사람들이 목격했기 때문에 예수가 생존했다 실존했다는 것에 대해선 의심이 없었죠. 하지만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실존 까지도 부정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가 복음을 전했을 때 거리끼던지 미련하던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이방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구하는 것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에 대해서 쓰는 것과 헬라인에 대해서 쓰는 단어들이 틀린데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표적과 능력이었고 기적이었습니다. 헬라인들 로마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거리끼는 것이었어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볼 때 그것은 능력이 없는 것이야 죽어 버렸잖아 능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고, 지혜를 구하던 헬라인들은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나 아닌 누군가가 십자가에 죽어서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죠. 누군가가 십자가에서 죽어 어떻게 내가 죄에서 구원을 받고 치유를 받는단 말인가 누군가 십자가에 죽어 어떻게 나를 우울과 절망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그것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지금의 나를 구원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죠. 사람의 말과 사람의 설득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은 사람의 힘과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설득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믿어지게 되죠. 어떤 사람들은 바로 믿기도 하지만 도마처럼 많은 질문과 의심과 또한 그러한 논쟁 이런 것들을 거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믿게 하신다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11장 24절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이었고 능력이 아니다라고 했고 헬라인들은 미련한 것이다라고 했죠. 지혜가 없다고 했죠. 하지만 그다음 절에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죠. 바로 우리가 주를 부른 것 같지만 우리가 무지해 어둠 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분이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부름심을 입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일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된다. 알량한 인간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주를 펼치시고 모든 별과 행성과 만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그러한 삶은 당장은 뭔가 된 거 같지만 또 될 거 같지만 결국엔 손안에 모래가 빠져나가듯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도 있죠. 또 우리는 합리적인 생각도 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도 하고 경험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우리의 생각과 경험과 이런 것들을 사용하시는 분이심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말씀을 기초로 한 성령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이 아무리 확실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경험들이 100% 확실했다 하더라고 오늘 또 내일 우리가 살아가고 의지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말씀 가운데 증언하시는 성령의 증언하심이라는 것이죠. 성령 성령 하면 말씀 없는 성령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고 진리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밝고 아름다운 증언을 하십니다.
성령의 증언은 이성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지적인 생각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지식의 시대죠. 유튜브를 틀어보면 모든 사람들의 지식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거기에 호소하지 않는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성령의 말씀하심은 우리의 영에서 빛처럼 일어납니다. 이성보다 빠르죠. 이성적으로는 A의 길인 거 같은데 성령의 내적인 증언이 B를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늘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장 큰 위대한 증언하심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 이시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증언에 기초하지 않은 증언은 거짓 증언이고 사단의 음성입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서 우리에게 증언하시죠.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의 삶의 다른 가장 작은 영역에 있어서 까지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거듭났으니까 이제는 내 생각대로 내 추론 데로 살아가야지 이것이 아닙니다.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성령을 통하여 증언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 아주 작은 일에 있어서 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미래에 갈 수도 없고 또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일들을 역사를 해석해서 역사서를 쓰기도 하지만 과거의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또 다 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내적인 증언하심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고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서도 증언하시죠.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의 그 영의 증언을 우리는 따라갑니다. 그곳에 길이 있고, 양식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망이 아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목사님? 이렇게 물을 수가 있겠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방법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또 그런 식으로 많은 곳에서... 또 누가 가르치지 않더라도 우리 안에 육체의 욕심이 있으면 그것을 내 힘으로 자제하고 억누르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수의 방법이죠.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냐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그래서 이 말씀이 저에게 너무너무 지혜가 되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아느리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느리라 이렇게 안되어 있다는 것이죠.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느리라 이렇게 되어 있죠. 육체의 욕심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을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생명과 빛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증언을 바라보는 것이에요. 그 빛을 바라보면 그 어둠이 어느새 사라지는 것이죠, 이러한 방식이 복음의 아름다운 방식인 것입니다. 행한다 여기에 너희는 성령에 따라 행하라 이것은 Do가 아닙니다. walk 걷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적인 증언에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마찬가지죠.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됩니다. 성령은 율법을 뛰어넘어 운행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죠. 하지만 성령을 따라가면 간음하지 말라 이것을 뛰어 넘어 아내를 사랑하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에요. 살인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이죠. 살인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인생을 추구하면 오히려 살인자의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살인자인 나를 위해 예수께서 살인당하시고 도륙당하시고 레위기에서 우리가 보고 있죠. 그것이 모두 살인하지 말라.. 사실 원문으로 보면 살인하지 말라 이렇게 안되어 있어요. 레위기에 보면 그것이 어떻게 보면 짐승을 죽이지 말라 피를 흘리지 말라 레위기의 제사들을 행하지 말라 표면적으로는 레위기의 제사를 주셔 놓고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그 제사 안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마음이 또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죠. 참 신기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번역을 살인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뛰어넘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살인한 자를 용서하게 되고 또 그 용서를 통하여 살인한 자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면 그 의도와는 반대로 우리는 죄의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잘못 때문이 아니죠. 우리의 육체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속박에서 속량 되었다는 자유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제사를 보고 있죠.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그중에 이 소제는 예수님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 주이지만 다섯 가지 제사는 모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제사들을 보면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듭니까? 너무나 참혹하죠. 제가 향기로운 레위기를 얘기하면서 향기 얘기하죠. 실제로 그 당시의 그 제사를 드리는 그 성막에 여러분이 서있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절대 향기로운 냄새 아닙니다. 참혹합니다. 그 피의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것에서 빨리 떠나고 싶을 정도로 그 피의 냄새가 진동을 하고 짐승의 살이 타는 그러한 냄새들이 계속해서 성막을 가득 채우고 있죠. 그런데 성령은 그것을 향기로운 냄새로 자꾸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 피 냄새가 진동하고 짐승의 살이 타는 것이 어떻게 향기로운 냄새가 될 수 있습니까 레위기의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볼 때에만 그 제사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를 주실 때에 사실 이 제사 아니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 제사로 예수를 알아야 해 하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치만 영이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그림자인 제사를 예수로 알아먹지 못하고 그리하여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제사가 역겹다 그 제사를 철저히 드렸지만 인간의 주체성을 내려놓지 못하고 열심히 제사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대 단성을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국 냄새가 역겹고 성전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데에는 이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레위기를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지만 이 모든 것을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데는 이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죄를 위해 죽으셨고 여러분의 의로움을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여러분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으면 됩니다. 천국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여러분을 이 땅에 파송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능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분이 하신일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다양한 측면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만나고 깊이 알아가는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은혜와 평강이 넘치고 능력과 지혜를 더욱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번제가 있고 화목제가 있습니다. 번제는 우리의 죄의 문제와 의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뜻한다고 했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 받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여러분이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제의 유익이 여러분에게 흐르게 됩니다. 믿음으로 여러분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화목제 곧 샬롬이 흐르게 됩니다. 화목제는 화평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화목제는 번제를 통해서 이미 온 화목 화평을 감사하거나 누리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즉, 그들은 죄를 지었을 때 화목제를 드리러 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제는 속죄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죄를 위해서는 번제나, 속건제나 속죄제를 드렸겠죠. 여러분이 번제나 속죄제를 통해 용서함을 받습니다. 의로움을 입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그 속죄의 기쁨이 크고 감사하죠. 그리고 그 속죄가 너무나 크고 위대하고 놀라운 속죄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서원하게 되고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고 자원하게 됩니다. 사랑하고 연애할 때 우리는 다 경험을 했죠. 사랑하게 되면 아낌없이 주고 싶은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흘러넘침이 바로 화목제입니다. 그리고 이 화목제를 통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처럼 여러분에게 임하는 그 축복이 더욱 흘러가게 됩니다. 더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죄 사함을 알고 나아가 감사와 자원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해질 때 우리에게 더욱 넘칠 것입니다. 샬라밈 우리에게 평강과 하나님의 축복이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또 번제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죠. 그 수소 위에 화목제가 기름이 같이 타서 향기로운 향기로 하나님께 올려진다고 했습니다. 번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죄사함과 의롭게 하심이 그 축복이 너무나 감사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그것이 너무나 크죠. 그것으로도 향기로운 향기입니다. 하지만 그 위에 화목제 그것을 감사하고 또 그것을 찬양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화목제의 기름이 태워지면서 하나님께 더욱더욱 향기로운 향기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경우에는 첫째로는 속죄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레위기 7장 15절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 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이것이 감사로 드리는 화목제입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번제를 통해서 속죄제를 통해서 속건제를 통해서 죄사함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의 경우 둘째는 화목제의 위대함을 알고 그분을 위한 서원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레위기 7장 16절
16.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무엇보다도 제물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것도 서원하고 저것도 서원해야지를 말하는 게 중심이 아니라 숨은 뜻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실 것을 서원하시고 또 서원하심 뿐만 아니라 서원대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참 화목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원으로 드리는 화목 제물은 그 제물을 셋째 날까지 나 두지 말고 둘째 날까지 다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날까지 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화목 제물에 본 실체가 서원으로 드리는 화목 제라면 바로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이 땅의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오르겠다는 서원으로 이 땅에 오셨죠 예수님이 그 서원을 죽으시고 셋째 날에 부활 하심으로 반드시 이루시는 참된 화목 제물이신 예수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까지 놔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날은 죽음에서 반드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제물 그대로 죽음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부활했고 하나님과 화평 한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믿으면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완전한 화목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일 안에 안식할 때 진정한 감사와 서원과 또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의탁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 헌신을 하나님은 원하시죠. 

이혼하지 않기 위해서 아내에게 해야 할 10 계명 이런 것들을 걸어 놓고 작성해 놓고 그것을 하나하나 지켜 갈려고 스트레스받으면서 매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그러한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죠.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비바람이 치는 날이지만 꽃가게에 들러 한 송이 꽃을 품에 품고 집에 들어가는 그러한 신약의 삶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작은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원하시는 것이죠. 이것이 화목제를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또 우리에게 맡기신 자들을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영원한 죄인으로 지옥에 갈 자를 예수의 십자가로 살리시고 아들 삼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시고 아내를 선물로 주셨다는 것에 안식하시기를 바랍니다. 화목제에 숨어있는 우리의 삶의 실제적인 영역의 비밀이에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내가 왜 저 원수를 만나 이렇게 고생을 하나 이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구나 이렇게 인정해 그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즐거워 하는 것 비밀은 그것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즐거워하고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한데 많은 경우 우리는 낭비하고 있죠. 그것을 주신 것 안에 비밀이 있습니다. 주신 화목제를 먹으세요. 화목제를 드리고 이튿날까지 먹어야 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화평으로 주신 모든 것 우리에게 주신 그 선물들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인정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축복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먹는 것입니다. 그 화목제 위에 하나님께서 모든 면에서의 샬롬의 복수 즉 샬라밈 평화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선물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즐거워하십시오. 축복하고 사랑해 주십시오. 용서하십시오. 하나님의 샬랴밈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젊을 때 영찬이를 낳고 나서도 아내를 위해서 섬기기보다는 빨리 돈을 벌어야지 하고 내팽개치고 직장 구하러 막 정신없이 쫓아다녔어요. 그러한 과거의 어리석음이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죠. 즐거워할 줄 몰랐습니다. 주신 것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는데 말이죠.

자녀들도 마찬가지죠. 자녀들의 성적을 어떻게 받아왔는지 그런 걸로 자녀들을 판단하지 마시고 즐거워하십시오. 아무리 안 좋은 점수를 받아왔고 또 자신의 기대와 다른 모습으로 갈지라도 그 자녀를 위해 축복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이 흐르게 되고 진정한 하나님의 형통이 자녀와 가정에 흐르게 될 것입니다. 화목제의 비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무엇이냐면 화평이라는 것을 우리들의 우리 속의 특별한 자세나 태도 속에 둘 때 또는 오래 명상을 할 때 한적한 시골에 가서 시간을 보낼 때 그럴 때 주시는 평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죠. 여러분에게 평화가 필요하죠.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은 어디 멀리 조용한 곳에 가서 명상을 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만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 페러다임을 깨야 합니다. 거기에 갇히게 되면 그 갇힌 페러다임 안에 우리의 생각과 영이 갇혀서 그러한 환경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참된 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 페러다임을 깨버려야 합니다. 참된 평안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진정한 화평을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에게 참된 화평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 분을 믿고 바라볼 때 여러분이 받는 것이 참된 샬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평안을 누리기 위해선 우리는 사실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이 펜데믹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이 펜데믹이 끝나면 평안이 옵니까?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죠. 자녀들이 다 잘되야 평안이 옵니까?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죠. 내가 직장이 다 잘 구해지고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면 주어지는 평안이라면 그것은 세상이 주어주는 평안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평안의 참 된 근원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안이다. 우리는 전쟁 가운데서도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평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주님이 재림 하시기 전까지는 전쟁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평안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 평안을 주노라. 이미 주신 평안을 받을 때 이러한 어떠한 펜데믹 가운데서도 어떠한 전쟁 가운데서도 주님이 나에게 이 평안을 주시는 구나 주님이 내 평안이구나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 때 그때 전쟁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펜데믹과 걸림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기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계속 부족하고 결핍과 하나님이 나의 주님인데도 계속 뭔가를 향해서 달려가기만 한다면 참된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 안에서 확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구나 모든 것이 아버지것이 다 나의 것이구나 나는 왕의 자녀로 이 땅 가운데 세워졌구나 그러한 평안을 주님이 주시는 평안 가운데 먼저 설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세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이 누려셨던 평안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메달 때에도 주님은 이 평안이 있었죠. 너무나 놀랍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 평안을 받으십시오. 주님 안에 이 평안이 있었고 이 평안으로 눈 먼자를 보게 하셨고 병든자를 고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 오늘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들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러합니까? 내일의 지표나 통계나 세상의 종말 할거 같은 무거운 뉴스들 나의 생각과는 달리 어긋나고 있는 나의 상황들 때문에 두렵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평안의 근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마음에 두려워하고 근심하지도 말라. 그것이 다 해결되어서가 아닙니다. 그전에

주님 안에서 먼저 참된 평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참된 치유가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계속 요동 칩니다. 내 생각과 다르게 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 안에서 참 된 평안으로 굳건히 서있으면 그 평안이 자녀를 치유하게 할 것입니다. 세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은 온 갖 뉴스로 요동치죠. 그러나 교회를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참 된 평안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주님의 몸입니다. 어떠한 세상의 전쟁과 핍박과 환란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이 평안으로 굳건하게 서있으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상담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찾아와 상담할 때 여러분이 불안하면 그 상담은 실패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붙잡고 내가 평안 가운데 있다면 그 평안이 치유의 힘을 일으킵니다. 주님이 그렇게 치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시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하신 그 때에도 세상은 혼돈 가운데 있었습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내다 보시는 주님의 말씀을 오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번제와 화목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고 있습니다. 번제에서 수소에 안수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음을 믿습니다. 수소와 양과 염소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낫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화목제에서 제물의 기름이 수소 위에서 타면서 향기로운 향기로 올라가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우리들에게 주시는 샬롬의 축복을 더욱 넘치게 받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성경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주어집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예수를 볼 때에 어거스틴이 그렇게 했죠. 사람이 하나님 품에 안식하기 전까지는 결코 인간에게는 참 된 안식이 없다고 했죠.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영원하신 안식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과 시간을 자꾸만 더욱 보내고 복음을 주목하고 그렇게 하면 신비하게도 하나님의 안식과 평강이 우리에게 흘러 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님과 기도하는 이 시간이 우리에게 더욱 많아지고 깊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된 능력과 지혜를 주시죠. 성경에서 예수를 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시기도 하고 또한 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 예수가 비추어질 때 성령께서 춤추십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겠다고 할 때 성령은 춤 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할 때 성령이 춤을 춥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의롭게 하셨다. 예수가 하신 일을 높일 때 성령이 강력하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윗샘과 아랫 샘의 능력과 지혜로 임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알아갈 때 윗샘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임하십니다. 아랫 샘은 성령의 내적인 증언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랫 샘으로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에게 어떤 질병이 있을 때 그 질병을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주셔서 이런저런 음식을 줄이거나 먹지 않을 것을 내적 증언으로 밝혀 주시죠. 그것을 치유하시기도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의 아랫 샘으로써 내적 증언으로써 너가 이 음식을 이때까지 너무 많이 먹고 있었구나 그것을 줄여라 그것을 끊어라 이러한 내적인 증언을 하십니다. 능력과 증언으로 일을 하십니다. 윗샘과 아랫샘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사도들이 제자들 중에 일곱 집 사를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가 피로 사신 교회를 섬기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 집사들이 자기들의 경험과 이성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내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다 하기에는 규모들이 커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게 했고 집사를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분임 하죠.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서 집사들을 세웠다는 말은 무엇이냐면 집사들은 기도와 말씀 앞에 있었다는 말씀이죠. 사도들이 늘 그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집사들은 당연히 기도와 말씀 앞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있는 집사들을 안수할 때에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동일한 사도행전 6장에 스데반 집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는지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 8절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아주 하나님의 기사와 능력을 행하죠. 스데반 집사가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이 권능 이 권능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졌습니다. 크고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기를 선포합니다. 지금 능력과 지혜를 보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능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다음에 스데반 집사는 또한 지혜로 충만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0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이 태어날 때부터 언변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스데반에게 임하시사 스데반은 지혜가 충만하여 그들이 능히 스데반의 말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였습니다. 그 지혜로 인도함을 받고 그가 말할 때에 어두움이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임직을 맡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임직자뿐만이 아니죠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는 모든 성도들 가운데 넘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교회에 주신 축복입니다. 이 히브리서를 우리가 알고 있죠. 마지막으로 이 히브리서의 특징을 보면 그 구조가 대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여러분 쭉 읽어 보십시오. 1장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뭐를 자꾸만 대조해 가면서 기술해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땅의 장막과 하늘의 장막을 대조하는 거예요. 그리고 종이였던 모세와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또, 제사장과 참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대조해 가는 이유는 뭡니까? 참된 영광이시고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목적인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지 않고 구약 시대 사람들은 뭡니까? 종인 모세에게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낸 이유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에 집중하고 그 제사가 실체라고 붙들고 있고 그 모세를 추종하면서 그 모세를 그리스도보다 높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겨웠던 것이죠. 히브리서는 그 모든 대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기록 방식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 1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전당이라고 하죠. 믿음의 전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믿음의 선진들이 히브리서 11장이 열거하면서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이 하나님의 관점일까요? 그것도 대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장인 히브리서 12장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비록 본이 될만하지만 본질적으로 12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11장 선진들을 다 열거한 후 맨 끝에 이상한 구절이 있죠. 그들이 약속한 바를 다 받지 못했다 예수를 바라볼 때에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장을 볼까요 오늘 본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
   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1장의 많은 선진들이 중심이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를 빚어가실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을 닮지 못한데요. 하지만 12장에 주님이 마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거듭나 영생을 얻었습니다. 천국에 갈 자들입니다. 그러나 항구는 안전하고 여러분은 아름다운 배라고 하면 여러분의 그 배는 그 항구에 정박해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죠. 그 배가 항구에 있는 것이 얼마나 안전합니까. 그리고 그 배는 너무나 아름답죠. 하지만 그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너무나 아름답고 존귀한 거룩하고 의롭고 흠 없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정박해 있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에요. 항해하기 위해서 이 땅의 왕의 자녀로 파송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때로는 비바람도 있겠지만 십자가의 못 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살고 그분을 전하는 자로 항해하기 위해 부름 받은 자입니다. 항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그리고 구하고 사모하는 여러분에게 말씀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나의 분주함과 염려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잠잠히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수많은 말들을 할 수 있겠지만 목사로써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처방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길이시고 진리 이시고 생명이십니다. 

<기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저희 되기를 원합니다. 허망한 것을 바라보지 않게 하시고 자기의 욕심에 뿌리를 둔 사람을 이용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의 소리는 너무나 소란스럽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분이 나의 능력이고 그분이 나의 지혜임을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잠잠히 섭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끊고 이 시간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믿음을 시작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요, 이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삶의 목표가 매 순간순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사람에게는 실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를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나의 기대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놀랍고 위대하십니다. 하나님 상한 심정 예수를 바로 봄으로써 치유케 하시고 하나님 변동 많고 소란스러운 세상 가운데 사람의 능려과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봄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로 나를 속이는 세상 가운데 파송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거스르는 세상 가운데 파송되게 하시사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주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세상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고 비추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된 평안을 원합니다. 무엇이 끝나야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라 전쟁 가운데서도 펜데믹 가운데서도 주님은 나의 평안임을 고백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주님이 나의 평안임을 선포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무너져도 주님이 나의 평안임을 믿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안전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나를 삼키려고 다가 올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두려워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의 참 평안임을 선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어떠한 어둠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시고, 어떠한 흔들리는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의 평안입니다. 주님이 나의 능력입니다. 주님이 나의 지혜입니다. 주님이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겠지만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됨을 믿습니다. 믿음의 항해자로써 주님께 닻을 내리고 항해의 돚을 달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스데반 집사처럼 능력을 더하시사 표적과 기사가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더하사 능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지혜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무엇이 끝나고 해결되어야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라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참 된 평안을 얻게 하시고 그 평안이 우리의 삶의 능력이 되고 지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크라이나와 전쟁이 있는 땅에 평안이 있게 하시고 전쟁이 속히 끝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한반도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위정자와 모든 정세를 다스리시사 이 땅의 참 된 평화가 유지되고 더욱 하나님 나라가 번성케 하여 주시옵소서. 육신의 질병으로 누워있는 고통받고 있는 환우들 찾아가 주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드린 예물 위에 기름 부으시고 쓰이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위로 교통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늘 깨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흠 없고 거룩한 교회 위에 선교사님들 위에 나라과 민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언 하옵나이다. 아멘

 

 

 

 

 

 

 

 

 

 

 

 

 

 

 

 

 

 

 

 

 

 

 

 

 

 

 

 

반응형